쿠로바스

[쿠로바스/화황]마가렛-마음속에 감춘 사랑

물빛녘 2015. 3. 1. 00:46

※카가키세


[쿠로바스/화황]마가렛-마음속에 감춘 사랑

written by. 티토




땀이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탕, 탕. 골대를 통과한 농구공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거친 숨을 고르며 간신히 서있던 나는 결국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아아, 저 녀석은 부상 때문에 한동안 연습 안 했을 텐데……. 내심 분하기도 했지만, 입꼬리가 자꾸 올라갔다. 강하다. 저 녀석은 강해. 히죽 웃으며 아예 바닥에 누웠다. 아, 덥다. 초여름이건만 이 정도 더위면, 앞으로는 얼마나 더 더워지는 거지. 따가운 햇살에 인상을 찌푸렸다.


“에에― 벌써 항복임까?”


“……항복은 아닌데.”


“뻗었으면서.”


갑자기 얼굴을 들이댄 키세 때문에 심장이 덜컥했다. 이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침을 꿀꺽 삼키며 간신히 대꾸하자 키세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물론 말은 부드럽지 않았지만. 이내 키세는 내 옆에 누우며 중얼거렸다. 여름이네여―. 침울한 그의 목소리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힐끗 바라 본 키세의 눈동자는 잠겨 있었다. 그 녀석과의 추억에, 그리고 이별에.


가해자가 분명한 사고였다. 음주운전자의 과속에 의한 사고. 키세의, 그리고 나의 눈앞에서 벌어진 참혹한 사고. 그 한 건의 사고로 인해 키세는 사랑하던, 아니 사랑하는 연인을 잃었다. 따라 목숨을 끊으려던 그를 말린 게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손목에서 흘러 내리는 붉은 피, 초점없는 눈동자, 슬픈 미소.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대신 내가 옆에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무서웠다. 키세에게 그의 존재가 얼마나 큰지 알기 때문에.


“카가밋치.”


잠겨 있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키세는 입을 벙긋벙긋하더니 말을 이었다.


“……덥슴다. 아이스크림 사줘여.”


……걱정한 내가 잘못이지.


***


“와아― 살 것 같슴다!”


좀 전까지 침울했던 건 누구였냐는 듯 키세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쿠로코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키세 군은 은근히 단순합니다. 아아, 전적으로 동감.


“아앗, 카가밋치.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


키세의 다급한 외침에 아이스크림을 보니 흐르고 있었다. 어? 멍하니 있다 정신을 차리니 이미 손으로 흘러내린 뒤였다.


“녹았다.”


“그러게 흐른다 했잖아여!”


아니, 너가 언제 흐른다는 말을 했던 건데. 황당함에 키세를 흘겨 보다 반쯤 남아 있던 아이스크림을 한 입에 넣었다. 손 찐득찐득한데.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나는 키세가 옆에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디 간 거지. 설마, 설마. 불안감에 다리를 달달 떨다 큰길가로 나가 찾기로 결정했을 때, 편의점 안에서 키세가 나왔다. 생수통과 티슈를 들고 나오던 그는 내가 안색이 파래져 있자 대강 상황을 짐작했는지 쓴웃음을 지었다. 생수통 뚜껑을 열어 아이스크림이 녹아서 끈적해진 내 손에 물을 부었다.


“안 죽슴다.”


두서없는 말이었지만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입안이 텁텁해졌다. 안 죽는다. 그 말에는 물기가 젖어 있었다. 그는―, 키세는 못 죽는 게 아니었다. 다시 말해 그는 언제든지 죽음을 택할 수 있는 상태였다. 현재 키세에게는 삶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지 않았다. 작년, 그 날 이후로.


“카가밋치.”


차분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키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에게 티슈 두 장을 건넨 그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게임 센터 갈래여?”


위태로운 웃음에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키세, 네 상처는 언제쯤 아물려나. 이럴 때면 그의 존재는 너에게 있어 얼마나 컸는가를 실감하곤 한다. 둘 사이를 알았기에 나는 그만큼 두려운 걸까. 너에게 그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결국 네 뒷모습을 지켜보는 것에 만족해 버렸다.


“아, 마가렛꽃이다.”


둘 사이의 침묵을 깬 것은 키세. 바닥을 보고 걷던 나는 고개를 들어 키세의 시선을 쫓았다. 그러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꽃집 앞에 심어져 있는 노란 꽃이었다.


“샤스타데이지?”


“앗, 비슷하지만 아님다. 마가렛임다. 그 왜 영화보면 꽃점 보잖아여? 그 때 자주 쓰는 꽃이라는데여. 꽃말은―.”


“오오.”


짧은 감탄사를 내뱉자 키세가 웃으며 내 팔을 잡아끌었다. 얼마 걷지 않아 나타난 게임센터로 들어갔다. 키세의 손에 이끌려 이 게임 저 게임을 했는데 거의 완패. 키세 녀석, 게임 센터 단골인건가. 주변을 둘러보던 키세는 펀치게임 기계를 보더니 씨익 웃었다.


“에에, 카가밋치, 라스트로 펀치게임 가져?”


“이건 자신 있어.”


“그건 해봐야 아는 검다.”


결과는 내가 이겼다. 키세는 납득할 수 없다며 재대결을 요청했지만, 밖을 보라는 내 말에 입을 죽 내밀며 포기했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붉게, 그 날처럼.


“다음번에 만날 때 리벤지할검다.”


“켁, 너 포기 안 한거냐.”


“전 지고는 못 삼다. 다음에 봐여.”


의기양양하게 나를 바라보던 키세는 이윽고 몸을 돌려 역쪽으로 걸어갔다.


키세 료타. 네가 좋다. 하지만 이 말을 할 날은 오지 않겠지만. 착잡한 심정으로 중얼거리자 키세가 돌아봤다. 노을 때문에 붉게 물들은 금빛 머리카락과 눈물을 흘리면서 환한 웃음을 짓는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키세는 두 손을 입으로 가져가 외쳤다.


“다음번에 꼭 이길 거니까! 꼭 이길 거니까! 약속 잊지 마여!”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키세는 몸을 돌렸다. 어깨가 들썩거리고 있었다. 그가 어떤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스스로 슬픔을 이겨내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는 것, 그게 내가 알 수 있는 한 가지였다. 너야말로 잊지 마, 약속.


“나도 이제 돌아갈까.”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눈 앞에 꽃집이, 그리고 노란 마가렛이 보였다. 꽃을 보자 키세가 떠올랐다. 수줍게 웃으며 말했던 꽃말 또한. 홀린 듯 들어간 꽃집 안에는 온갖 종류의 꽃들이 있었다. 그 와중에 장미꽃이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 키세를 봤을 때 장미같다―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지금 보니 소박한 마가렛꽃을 닮지 않았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꽃을 포장하고 있던 여직원이 웃으며 다가왔다. 무슨 꽃을 찾으세요? 정중한 물음에 나는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마가렛이요. 노란색으로.”


그 말이 뜻밖이었는지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문제라도 있는 걸까. 꽃이 없다거나. 잠시 뒤 그녀가 살짝 웃으며 내 의문을 풀어줬다.


“요즘은 화려한 꽃을 찾으시는 분들이 많으셔서, 조금 의외다 싶었어요. 예쁘죠? 꽃이 작은데다가 화려하지도 않아서 많이 찾으시진 않지만. 마거리트라고 발음하는데요. 다른 이름은 보스턴 데이지에요. 꽃점 볼 때 많이 쓰기도 하고. 아, 참. 꽃말이 로맨틱하답니다. 진실한 사랑, 예언, 사랑을 점친다, 비밀을 밝힌다, 그리고―.”


의외의 손님에 신이 난건지 그녀는 이런저런 설명을 늘어 놓았다.


““마음 속에 감춘 사랑””


놀란 그녀의 모습에 살짝 웃으며 화분을 건네 받았다. 여러 개의 꽃말 중 키세가 나에게 말해 준 하나의 꽃말. 그리고 키세, 너를 향한 나의 사랑 방식.


키세, 솔직히 나는 아직 두렵다. 네가 힘들 때 지탱해 줄 수 있을지.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너를 향한 감정엔 거짓이 들어 있지 않다는 것. 키세, 아직까진 나 혼자만의 짝사랑으로 묻어둔다. 언젠가, 언젠가 내가 용기가 생겼을 때, 그 때는 고백해도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