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바스

[쿠로바스/화황]마가렛, 그 후의 이야기

물빛녘 2015. 3. 1. 00:48

※[쿠로바스/화황]마가렛-마음속에 감춘 사랑(http://teato263.tistory.com/43)의 뒷이야기입니다.

※카가키세

[쿠로바스/화황]마가렛, 그 후의 이야기

written by. 티토


 

이제 이 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있는 것은 몇 개의 가방, 상자와 나 자신뿐. 텅텅 비어버린 방 안에서 멍하니 서있었다. 테이프로 봉해진 커다란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무의식적으로 다가가 그 상자를 쓰다듬었다. 이 안에, 이 안에 있어. 그와 내가. 우리 둘이 지내왔던 추억들이. 그 모든 게. 상자에 큼지막하게 적힌 주소는 내 본가였다. 부모님이 사시는, 내가 학생일 때 살던 그 곳으로 보내는 택배. 그와 함께 보내는 것인 이 하얀 봉투에 담긴 편지였다.


편지에는 내가 미국으로 떠난다는 사실과 이 상자는 절대 열어 보지 말라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갑작스레 떠난다는 것에 놀라실 것 같지만 부모님이라면 분명 이해해주실 것이다. 이 곳에 남아있고 싶지 않아, 라는 내 감정을. 전화를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논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섭섭해하실 것 같지만 목소리를 들으면 떠나지 못할 것 같아서 전화는 미국에 가서 하기로 마음먹었다.


3년. 지독한 악몽에 시달린 것이 오늘로 딱 3년이었다. 그를 떠나 보낸 뒤로 3년. 환했던 내 세계가 칠흑으로 변하기 시작했던 그 날. 그를 따라가려고 몇번이나 시도했었고 그 모든 시도들은 실패로 돌아갔다. 어째서? 당신은 내가 그곳에 가는 게 싫은 거야? 왜? 항상 함께라고 말했었잖아. 다른 사람들의 시선따윈 상관할 필요 없다고. 언제나 같이 있자고 했던 건 당신 아니었어?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줬던 건 당신이잖아. 상자에서 손을 뗐다. 이미 가 버린 사람에게 말을 걸어 봤자겠지. 공허한 방 안에 드러누워 천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곳은 어때? 살만해? 나를 남겨 두면서까지 그렇게 가고 싶어했던 곳이 마음에 들어?

 

모두 운전자의 과실에 의한 사고라고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그가 이 지독한 곳에서 벗어나길 바랐다는 것을 몇년동안 같이 살아온 나라서 알 수 있다. 그는 자살 충동에 시달렸고 달려오는 자동차를 피할 수 있었음에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소원하던 하늘나라로 떠나버렸다. 젠장. 대체 왜 나에게 말도 없이 가 버린 거냐고.

 

뻗었던 손을 내렸다. 대신 양손을 얼굴에 파묻었다. 어찌되었건 그가 나를 떠난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그가 나에게 질렸던 게 아닐까. 상담상대가 되지 못할 정도로 나는 그에게 신뢰를 받지 못했던 걸까. 생각은 꼬리를 물고 파국으로 치닫는다.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결말으로.

 

"진짜 비참하잖아……."

 

목소리에는 물기가 어려 누가 들어도 울먹거리고 있다, 라고 생각될 정도다. 눈에서는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좀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정말 못됐어, 아오미넷치……."

 

첫만남은 학교에서. 지루함에 치를 떨던 나를 체육관으로 이끌었던 그와의 첫만남. 벌써 몇년이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며칠 전의 일인 양 눈에 선했다. 풋풋했던 그의 얼굴마저도. 모든 게 선명한 기억들이건만 그건 이미 추억으로 묻어 둔 일이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약속을 저버리고 먼저 가버린 그처럼 나도 결코 좋은 녀석이 아니다. 외로움에 몸부림칠 때, 이용했으니까. 순수한 의도로 나를 위로해주던 그를, 카가밋치를. 그가 나한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애초에 알고 있었다. 마치 좀 전에 그와 봤던 마가렛꽃과 같은 그런 감정. 소박하지만 진실된 그런 감정을 나는 이용하고 있었다. …역시 미국에 간다는 거, 카가밋치에게는 얘기해두는 게 좋지 않을까. 그리고 사과도.

 

띵동-.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올 사람이 누군지 짚어 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사람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손으로 바닥을 밀어내며 일어났다. 비틀비틀 발걸음을 옮겨 현관문 앞에서 누구냐고 물었지만 별 다른 소리는 들려 오지 않았다. 장난인가, 고민하고 있을 찰나 다시 띵동- 소리의 초인종이 울렸다. 젠장, 누군지 모르겠지만 대답해 줄 생각은 없는 듯 싶었다. 그래, 알았다고, 열어준다고. 입을 삐죽 내밀며 문을 열자 익숙한 머리통이 보였다. 붉은색과 검은색이 어우러진 투톤의 머리카락. …카가밋치였다. 손에는 검은 봉지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카가밋치?"

 

"키세, 술 한 잔 할래?"

 

전화도 없이 뭔 소리래. 한심하다는 생각을 담아 그를 흘겨 보자 카가밋치는 덤덤한 눈빛으로 받아쳤다. 어라, 이게 아닌데. 분명 평소의 그라면 어색한 웃음을 흘렸을 터였다. 지금 눈 앞에 있는 카가밋치는 웃음기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어찌보면 냉담하고, 어찌보면 실망감이 어린 표정이었다. 아차 싶은 마음에 뒤를 흘깃 쳐다 봤다. 가구 하나 찾아볼 수 없는 거실을 봤기에 그럴지도 모른다. …아니, 아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차분할 리는 없다. 누가 말해줬다던가. 그것도 아니다. 나는 지금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들어 와요."

 

몸을 비켜주며 말했다. 그러자 카가밋치는 거절의사도 없이 안으로 들어왔다. 작정하고 온 듯 보였다. 거실에 대충 앉아 카가밋치가 들고 온 봉지 안에서 맥주 두 캔을 꺼냈다. 안주는 보이지 않았다. 봉지 안에는 지금 꺼낸 두 캔까지 총 10캔이 들어 있었다. …미쳤냐. 정말 작정하고 술 마시러 온 걸까. 한숨을 내쉬며 카가밋치에게 한 캔을 건냈다.

 

"한 잔이 몇 캔이에요."

 

"너 다섯, 나 다섯."

 

"단순해서 좋네요."

 

높낮이가 별로 없어 물음이 아닌 것처럼 들렸겠지만 카가밋치는 짧게 대답했다. 아까 만났을 때하고는 분위기가 달라 다른 사람인 것만 같았다. 그를 힐끔 보며 맥주 캔을 따자 치이익- 특유의 소리가 났다. 홀짝 홀짝 마시면서 그가 무슨 얘기를 할 지 생각했다. 뭔가 질문이라도 하면 적절히 얼버무릴 생각이었다. 예를 들면 집 안이 왜 이렇게 허전하냐는 물음에는 부모님 댁에 내려 가 있기로 했다, 모두 바쁜데 폐 끼치긴 싫었다, 라고 대답하는 정도로.

 

"너, 미국가냐."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걸? 분명 아무한테도 꺼내지 않았던 말이었다. 친했던 쿠로콧치나 카사마츠 선배, 가족들에게까지도. 그런데 어째서 그걸? 예상치 못한 물음에 얼굴에 당황한 빛이 역력했을 것이라 생각이 문득 들자 황급히 표정을 수습하며 시치미 떼듯 태연하게 받아쳤다.

 

"누가 그래요?"

 

"쿠로코가. …아카시한테 들었다던데."

 

아카시. 카가밋치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카싯치에게 비밀을 가진다는 것은 언젠가 들킬 것이라는 의미였다. 어떻게 알아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카싯치는 재벌가의 후계자였다. 현재 일본 내의 대기업 대표이사로, 차기 회장 자리는 따놓은 당상이었다. 아직 어리기에 너무 과한 것은 아니냐는 말이 나올 법 했지만 그런 말 따위는 나돌지 않았다. 그런 아카싯치라면 그 정도는 알아냈으리라.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가 모른 척 해줄 것이라 생각했건만. 아오미넷치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던 날 이민을 제의했던 것은 그였으니까.

 

"…가요."

 

"그러냐."

 

카가밋치는 더는 묻지 않은 채 캔에 남아 있던 맥주를 한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곧바로 다른 캔을 손에 들었다. 왠지 모르게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뭔가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내 입에서는 아무런 말도 흘러 나오지 않았다. 그저 입만 벙끗하다 다물었을 뿐이다.

 

"진짜로 가냐."

 

평이한 높낮이었다. 물어 보는 게 아닌 되새김. 간다고 대답하려 했지만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진짜로. …진짜로? 가방 안에 있을 비행기 표가 떠올랐다. 내일 아침 비행기로 떠날 생각이었다. 근데 지금 와서 간다고 말하는 게 머뭇거려진다? 우스운 얘기다. 도대체 왜, 갑자기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 것도 아니고, 왜? 자괴감이 들어 맥주캔을 입에 댔다. 그러나 나오는 것은 한 방울뿐이었다. 아, 진짜. 신경질적으로 캔을 내려 둔 뒤 새로운 캔을 따서 벌컥 벌컥 마셨다. 그제서야 갈증이 가신 느낌이 들었다.

 

"…가지 말라고 해도 갈 검다."

 

"가지 말라고 안 해."

 

말이 끝나자마자 카가밋치는 또다시 맥주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 모습을 본 나도 한 입에 다 마셔 버렸다. 다시 답답해졌다. 그렇게 마시다 보니 각자 몫으로 한 캔만 남아 있었다. 젠장, 젠장. 적당히 마시면서 어울릴 생각이었는데.

 

"가지 말라고는 안 하는데…."

 

"에?"

 

"보낼 생각은 없어."

 

단호한 말투였다. 반박하려 했지만 서슬퍼런 그의 눈빛에 눌려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멍해짐과 동시에 한켠으로는 안도감이 들었다. 왜일까. 카가밋치가 그런 말을 해주길 바라고 있었던 걸까. 어째서? …오늘 나 자신에게 이유를 묻는 일이 잦은 것 같다.

 

"마가렛."

 

"…네?"

 

내 의문에 카가밋치는 아무 말 없이 턱짓으로 남아 있던 다른 봉지를 가리켰다. 부스럭 소리를 내며 매듭을 풀자 노란 마가렛꽃이 담긴 화분이 나왔다. 이게 왜?


"꽃말은 마음 속에 감춘 사랑. 그리고…."


마지막 남은 맥주캔을 다 비우며 카가밋치가 살짝 웃었다.


"진실한 사랑."


"에…, 뭐, 하나의 꽃에 수많은 꽃말이 있다니까요."


"사랑해, 키세."


심장이 덜컥 주저앉는 기분이었다. 아아, 나는 기다리고 있었구나, 그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오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좀 전에 흘렸던 눈물과는 다른 의미로. 아까는 절망이었다면, 지금은 기쁨이었다. 그래, 나는 카가밋치를 사랑하게 되었구나. 그가 내 옆에 있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사랑이었구나. 카가밋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내 손을 카가밋치가 잡아 당겼다. 영락없이 그의 품에 안기게 된 나는 펑펑 울음을 쏟아 냈다.


"아껴줄게. 평생을 함께 하고 싶어. 같이 살자. 나는 너를 떠나지 않아. 사랑해, 키세. …료타."


카가밋치가 귓가에 속삭였다. 울음에 목이 막혀 대답을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미안, 아오미넷치. 그리고 이제 정말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