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바스/흑화]생일 축하해, 테츠야.
※쿠로코 생일(1/31) 기념 글로 쓴 글
※쿠로카가
[쿠로바스/흑화]생일 축하해, 테츠야.
written by. 티토
10년. 권태기가 찾아 와도 이상하지 않을 기간이었다.
쿠로코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작업하던 창을 닫았다. 좀 전부터 진도가 나가지 않아 전기세 낭비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달칵. 달칵. 마우스를 움직여 컴퓨터를 끈 후에도 잠시 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권태기. 그럴지도 모른다. 그것으로 그의 행동이 다 설명된다. 스킨십 거부, 묘한 거리감, 늦은 귀가 등. 요 몇 주간 봐 왔던 모습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와 동시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뭐가 문제였을까. 잦은 스킨십인가. 아니면 애초에 남자와 남자간의 연애가 오래 지속되길 바라는 것이 문제였던가. 27세, 보통 성인 남자라면 누구나 자신의 가정을 꾸려 나가고 싶어질 때다. 그도 그런 걸까.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두통은 점점 더 심해져 약을 먹지 않고서는 버티기 힘들 지경이 되었다. 약이 어디 있더라. 자리에서 일어나 약상자를 찾다가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두통에 시달릴 때마다 약을 찾아 건네줬던 것은 자신의 연인이었다. 생활 곳곳에 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거실 벽에 걸린 시계에 눈이 갔다. 1시. 예전이라면 11시에 들어왔을 그가 아직도 집에 오지 않았다. 정말 권태기인 걸까. 그가 헤어지자라고 말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미련 없이 보내줄 수는 있을까.
고개를 저었다. 너무 앞서 나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레스토랑 운영 방안에 대해 논의하느라 늦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회의를 몇 주 동안, 그것도 매일?
따르릉―.
고요한 적막을 깨고 전화가 울렸다. 다급히 손을 뻗어 수화기에 귀를 가져갔다. 그일 것이라 생각해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러나 수화기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
―쿠로칭-.
나른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쿠로코를 불러 놓고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주변이 시끄러웠다. 술집에라도 있는 걸까. 데리러 와 달라 부탁하려는 걸까. 여러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늦었잖아!)
주변소음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지만 날카로운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높으면서도 고운 여성의 목소리였다. 모모이였다.
―(야, 1시잖아!)
아오미네의 목소리 또한 쿠로코의 귀에 들어왔다. 이 사람들이 달밤에 술을 먹고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술자리에 부르려는 거라면 사양이었다. 자신이 술에 약한 것을 잘 알고 있는 쿠로코는 웬만한 술자리는 피하는 편이었다. 만약 부른다면 정중히 거절할 생각이었다.
―(시끄러-, 나 전화중이야, 미네칭-.)집 근처 술집으로 나와-.
“……사양하고 싶습니다만.”
―에에? 안 오면 후회할건데.
“후우-. 알겠습니다. 그런데 집 근처 술집이 한 두개가 아닙니다만.”
쿠로코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하자 무라사키바라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뒷말을 기다렸으나 이내 통화가 끊겼다. 끊긴 전화에 잠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전화를 걸어 볼까 하다 이따 다시 전화가 오겠지-하는 마음으로 나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약 찾기를 포기하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세면대에 찬 물을 받고 얼굴을 담갔다. 차가운 물의 감촉에 정신이 말짱해졌다. 이대로 있으면 익사하지 않을까. 그것 나름대로 괜찮을지도.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정신이 말짱해지긴 무슨. 오히려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는 게 맞는 거 같았다. 입안이 텁텁해졌다. 이별 통보를 받는 날엔 어쩌려고.
반팔 티셔츠에 트레이닝복바지. 위에 가디건 하나만 입고 갈까 하다 와이셔츠와 니트, 면바지를 챙겨 입었다. 추위에 약한 편인데 이 차림으로 나간다면 분명 감기에 걸릴 것이다. 감기에 걸리면 여러모로 성가시니까.
휴대폰을 들고 이제 어떡하나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메일이 왔다. 확인해 보니 아카시가 보낸 것이었다.
「밖으로 나와.」
마치 쿠로코가 준비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처럼 보이는 메일이었다. 외투를 걸친 후 현관문을 나서다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환하게 밝혀진 거실이 보였다. 거실로 되돌아 와 불을 끈 뒤 다시 신발을 신었다. 어두컴컴해진 거실의 관경에 왠지 모르게 울컥했다. 불을 껐을 뿐인데 자신만 덩그러니 집에 혼자 있다는 사실이 피부로 다가왔다. 그것이 두려워져 도망치듯 문을 나섰다.
“내려 왔네.”
묘하게 들떠 보이는 아카시의 모습에 쿠로코는 그가 취한건가 잠시 고민했다. 진실 여부는 그가 취한 것을 본 적이 없으니 확인할 수가 없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장소를 알려 주셔도 될 텐데 굳이-.”
“아직 시간이 남았거든.”
“네?”
빙긋 웃는 눈앞의 사내 때문에 쿠로코의 얼굴은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전화를 받을 때부터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뿐이었다. 늦었다. 시간이 남았다. 대체 무슨 일인건지.
“뭐 그것도 있고, 할 얘기도 있어서.”
쿠로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카시는 발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는 기억해?”
"네?"
“……자기 생일정도는 기억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
그 말에 쓴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쿠로코의 모습에 의아한 표정을 짓던 아카시는 이내 표정을 굳혔다. 대강의 상황을 짐작했으리라.
“하여간 티내지 말라고 했건만.”
신랄한 어조로 중얼거리던 아카시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와 동시에 자리에 멈춰 섰다. 몇 발자국 뒤에서 걸어가고 있던 쿠로코 또한 멈춰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몇 주년이지?”
뜬금없이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눈만 깜빡거리던 쿠로코는 조금 뒤 그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입안에 감도는 쓴 맛에 인상을 찌푸리다 이내 울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10주년이네요.”
“세월 참 빠르군.”
잠시 침묵이 그들 사이에 맴돌았다.
“그러고 보니 테츠야, 올해는 준비 안 했는가 봐?”
“네……, 뭐. 요새 정신이 없다보니 벌써 오늘이네요.”
날짜를 셀 여력이 없었다. 원고 마감일에 쫓기랴, 그가 권태기에 접어 든 건가 바람을 피우는 중인건가 자신에게 질린 건가 걱정하랴. 시간에 쫓기고, 불안감에 떨었다.
“그나저나 할 얘기라는 건 뭔가요?”
“어? 아아, 예전부터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타이밍을 못 잡았거든. ……고맙다고. 솔직히 난 이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 패배하는 것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거라고. 하지만 그건 아닌 거 같더라. 져도 다시 일어서면 돼. 그걸 알려줘서 고마워.”
머쓱한지 아카시는 쿠로코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쿠로코는 살짝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들었다. 검은 밤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잊었다시피 했던, 그와 함께 웃고 울던 그 날이.
입을 벙긋벙긋하던 쿠로코는 이내 마음을 굳혀 자신이 제일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타이가군도 거기에?”
“응”
아카시는 주저하며 묻는 쿠로코의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대답에 쿠로코는 몸을 돌렸다.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아니,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날처럼 있을 수 없다는 걸.
“돌아가겠습니다.”
“겁쟁이가 되었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오늘 쓴 웃음만 몇 번 짓는 건지. 쿠로코는 침을 삼키며 눈을 질끈 감았다.
뭐가 무서운 건데. 귓가로 아카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은 무엇이 무서운 걸까. 헤어지자는 말이 나올까봐? 그에게 다른 사람이 생겼다는 말을 들을까봐?
“얘기는 해보는 게 어때? 지레짐작하지 마.”
서늘한 말투였다. 하긴 이 문제에 대해 아직 그와 얘기를 나눈 적이 없다는 것이 생각났다. 물어보기 전부터 단정 짓고 있었다. 언제부터 자신이 이렇게 겁쟁이가 된 걸까.
대답을 듣는 게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만 끝내자는 그런 대답이 나올까봐. 더 이상 상처받긴 싫었다. 말하자. 자신이 먼저 말하는 거다.
“테츠야, 너 오해하고 있는 거 같은데.”
“네?”
“카가미가 헤어지자고 그래?”
“……말은 안 했지만, 아마.”
아카시가 한숨을 내쉬었다. 쿠로코는 저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너희 둘 다 정말 귀찮네.”
아카시는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 후 다시 말을 이었다.
“둘 다 서로 좋아 죽겠으면서, 상대가 나 싫어할까 걱정하는 건 뭐야?”
“네?”
어리벙벙한 쿠로코의 반응에 아카시가 피식 웃었다.
“우리가 늘 모이던 술집으로 어서 가 봐. 그럼 알게 될 거야.”
쿠로코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뛰어가다시피 몇 발자국 걸어가다 뒤를 돌아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아카시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축하 인사는 애인한테 가장 먼저 듣는 게 낫겠지.”
그 말에 쿠로코가 살짝 웃음을 지으며 다시 술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뛰어가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착한 술집은 불이 꺼져 있었다. 어라? 당황스러웠다.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해 보니 30분 정도가 흘러 있었다. 벌써 간 건가? 설마.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고민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을 밀어 보니 조금 밀리는 게 느껴졌다. 열려 있었다. 숨을 고르며 문을 밀고 들어서자 파열음과 함께 불이 켜졌다. 눈이 부셔 질끈 감았다 떴다.
쿠로코의 시야에 들어 온 것은 우선 풍선이었다. 카페 벽면에 붙여져 있는 풍선들은 색이 가지각색이었다. 그리고 큼지막하게 써진 글씨들도 눈에 들어왔다.
‘쿠로코 테츠야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코가 시큰거리는 것을 느끼며 눈앞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하나 둘-.”
“생일 축하해!”
모모이를 선두로 모두 하나둘씩 생일축하해라고 외쳤다. 환하게 웃던 쿠로코는 이내 자신이 찾던 사람이 안 보인다는 걸 알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있다고 했는데.
“야, 케이크.”
아오미네는 등 뒤를 힐끔 보며 말했다. 그와 거의 동시에 무라사키바라와 미도리마도 등 뒤를 힐끔 봤다.
세 명의 뒤에서 나온 것은 그였다. 카가미 타이가, 자신의 연인. 손에는 커다란 생크림 케이크가 들려 있었다. 한가운데 있는 것은 그와 자신의 모습을 띈 조그만 장식도 보였다. 그리고 케이크 위에 적힌 문구.
“Happy Birthday, 테츠야.”
쑥스러운 듯 자신과 눈을 못 마주치는 모습에 쿠로코는 살며시 웃음을 지었다. 괜한 걱정이었다. 지난 몇 주간 쌓여 왔던 불안감들이 눈 녹듯 사라졌다.
“너무 하네요.”
화난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자 눈에 띄게 당황하는 그의 모습이 귀여웠다. 자신보다 키도, 체격도 큰 그였지만, 자신의 눈에는 귀엽게만 보였다. 이게 콩깍지가 씌었다는 걸까.
“몇 주간 얼마나 맘 졸였는데.”
그 말과 동시에 웃음을 참지 못 한 쿠로코는 크게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안심이 되었지 카가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자신도 민망한 지 웃기 시작했다. 겨우 웃음을 멈춘 카가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평소처럼 하면 다 말해 버릴 거 같았거든.”
“하마터면 큰 일 날 뻔 했어.”
아카시가 문을 열고 들어오며 말했다. 살짝 카가미를 노려보다 이내 고개를 저으며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카가미는 머쓱함에 뒷목을 긁적이려다 자신의 손에 케이크가 들려 있는 것을 깨닫고 아오미네의 다리를 발로 찼다. 신경질적으로 카가미를 향해 고개를 돌린 아오미네는 케이크를 보고 아차 하며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그와 동시에 옆에 있던 모모이에게 한 소리 듣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대충 한 귀로 흘려서 들은 아오미네는 초에 불을 붙였다. 흡족한 듯 웃는 카가미의 모습에 아오미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 소원 빌고 불어.”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카가미가 케이크를 쿠로코의 앞에 내밀었다.
눈을 감고 빈 소원은 어떻게 보면 자신에게 당연한 거였지만 간절히 바라는 거였다.
“무슨 소원 빌었어?”
“그런 건 말로 하면 안 되는 겁니다만.”
“아, 그런가.”
둘이 마주보며 히히 웃고 있을 때 무라사키바라가 살며시 다가오더니 케이크에 손을 가져가 케이크 덩어리를 한 웅큼 쥐어 쿠로코의 얼굴에 던졌다.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카가미가 멍해져 있을 때 쿠로코는 어느새 정신을 차려 자신의 얼굴에 묻은 생크림을 닦아 무라사키바라에게 다시 던졌다.
“으아.”
“먹을 거로 장난치지 마.”
“예비용으로 만들어두길 잘 했다.”
아카시의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카가미는 조용히 중얼거리며 자신 또한 한 웅큼 잡아 무라사키바라에게 던졌다. 그와 동시에 유치한 싸움은 시작되었다. 어느새 하나 둘씩 참가해서는 나중엔 모두 생크림 범벅이었다.
반으로 갈려 잠시 대치 상태에 들어갔을 때 쿠로코는 카가미와 눈이 마주쳤다. 둘 다 눈을 깜빡이다 이내 웃었다.
언제까지나 이 행복이 계속되길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