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바스
[쿠로바스/앵황]취미
물빛녘
2015. 3. 1. 10:38
※사쿠키세
[쿠로바스/앵황]취미
written by. 티토
"어라? 아오미넷치?"
등 뒤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오미네상은 힐끗 뒤를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길래? 조심스레 뒤를 돌아보니 해맑게 웃는 노란 머리카락의 소년이 보였다. 주목받고 있는 건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손을 붕붕 흔들며 인사하고 있는 모습에 심장이 떨리기 시작했다. 오늘 모모이상을 대신하여 동아리 비품을 사러 온 자신에게 약간의 칭찬을.
"아, 뭐야. 키세냐?"
아오미네상은 귀찮다는듯 한손으로 귀를 후비며 몸을 돌려 키세상을 바라보았다. 성의없는 태도에 키세상이 발끈하며 볼을 부풀렸다. 귀, 귀엽다-라는 내 감상평과는 달리 아오미네상은 못 볼 걸 봤다는 양 처참하게 구겨졌다. 그 바람에 키세상이 울상을 지으며 찡얼거렸다. 아오미네상의 미간이 더 찌푸려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사람의 얼굴이 찌푸려질 수 있는 한계를 넘은 것 같았다. 그것에 기겁한 건 나뿐이었는지 키세상은 입을 삐죽이며 아오미네상에게 투정부리는 것을 계속했다.
"우아아아아- 너무함다."
"시꺼-. 것보다 카나가와현에 있을 니 놈이 왜 여기 있는거냐?"
"쿠로콧치 만나러 왔슴다☆. 물론 쫓겨났지만."
"푸하하하! 네 녀석 바보 아냐?"
"시끄럽슴다. 적어도 당신한테 그 말 듣기 싫었어."
툴툴거리면서도 피식 피식 웃음이 새어나오고 있는 걸 보면 말처럼 기분이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멍하니 둘의 대화를 듣고 있으니 그런 내가 신경쓰였는지 말하는 내내 키세상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에……. 그러니까 토오의 사쿠라이군 맞죠?"
"엑……. 네…,네!"
이름을 부를 줄은 차마 생각을 못 했던지라 화들짝 놀라며 한참을 두고 대답했다. 잠시동안 의아한 표정을 지었던 키세상은 그러려니-하며 나를 향한 시선을 아오미네상에게로 돌렸다. 하아, 숨이 막히는 줄 알았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둘의 대화에 집중했다. 아, 이건 실례려나. 어쩔 줄 몰라하며 서 있는 사이, 이런 나를 두고 둘의 대화는 지속되었다.
"흐응-. 그래서 오늘은 무슨 조합임까?"
"엉? 사츠키가 동아리 비품 사야한다고 나 불러내더니 오늘 사정이 생겨서 못 나온다고 료한테 부탁했다던데."
"헤에?"
적의가 담긴 눈빛이 느껴진다. 허둥지둥 비품이 담긴 비닐봉투를 고쳐 들었다. 아오미네상에게 구원의 눈길을 보냈지만 모모이상의 전화를 받는 아오미네상이 눈치챌 일은 없었다. 키세상이 이렇게 적의를 드러냈다는 것은 내가 눈엣가시같은 존재라는 의미겠지. 은연 중에 눈치채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피부로 느끼게 되다니 마음 한 켠이 아려왔다. 키세상이 모델로 데뷔하면서부터 그를 동경해왔다는 것을 키세상은 알지 못 하겠지.
"아, 큰일이다. 압박붕대 안 샀어. 완전 귀찮네. 어이, 키세. 기왕 만난 김에 농구 한판하자. 너 공 있지?"
"에, 있슴다. 그나저나 아오미넷치 진짜?!"
"아씨, 놀랬잖아! 어쨌든 나 마저 사러 갔다올테니까 료랑 기다리고 있어."
"에, 저도?!"
"엉. 사츠키가 제대로 샀는지 검사하러 나온대. 수고했다고 뭐 먹으러 가자더라"
"어, 모못치 오는 검까?"
"엉. 기다리고 있어라. 도망가면 죽을 줄 알아."
아오미네상은 머리를 헤집으며 투덜거리더니 성큼성큼 저만치 걸어가버렸다. 어쩌다보니 둘만 남겨졌다. 어색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눈치만 슬슬 살피고 있으니 키세상이 먼저 입을 열어 적막을 깨뜨렸다.
"그럼 근처 농구 코트에 가 있을까요? 도망가면 아오미넷치가 화낼 거 같은데."
고개를 끄덕였다. 아오미네상 부디 빨리 오세요. 심장이 떨려 못 버티겠어요. 걸어가는 내내 몸이 덜덜 떨렸다. 스텝이 엉켜 넘어질 뻔하기도 했다. 먼저 농구코트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키세상의 뒤를 쫓아 걸어갔다. 뒷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같이 걷는다. 중학교 때 감히 꿈꾸지 못할 상황이었다. 물론 상대는 날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지만, 그건 덮어두자.
"으응~ 여기라면 아오미넷치라도 잘 찾을 수 있겠죠."
자연스럽게 아오미넷치를 길치로 만든 키세상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들고 있던 가방에서 농구공을 꺼냈다. 행동 하나하나가 화보같던 그 를 지켜보며 벤치에 앉았다. 탕탕-. 공을 두어번 바닥에 튕기더니 슛하는 자세를 하는 키세상의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완벽한 폼이다. 역시 기적의 세대라는 걸까.
"으챠-."
바닥에 떨어진 공을 주운 키세상은 벤치로 곧장 걸어와 내 옆에 앉았다. 가깝다. 패닉 상태가 되어 손만 꼼지락거렸다. 뭔가 얘기해야하나. 어쩌지. 나 이상해보이려나.
"사쿠라이군."
"엑, 죄송합니다아!!"
"에?"
"에?"
갑작스레 말을 걸어 온 것에 놀라 나도 모르게 죄송합니다-라고 내뱉었다. 어떡하지. 키세상, 나를 이상한 녀석으로 생각하는 건 아닐까. 뻣뻣하게 굳어 키세상을 바라보니 걱정과는 다르게 푸훗- 웃음을 터트리는 모습이 보였다. 아, 다행이다. 아니, 다행인 건가. 날 보고 웃었다는 것은 내가 웃겼다는 것이고, 키세상이 웃었다는 것은 기분이 좋다는 것일테니 좋은 것일텐데 어찌보면 내가 이상한 녀석으로 낙인찍혔다는 의미니까 안 좋은 것 같기도 하고.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으니 키세상이 킥킥 거리며 말했다.
"긴장할 것 없슴다."
"에, 죄송합-."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말을 키세상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죄송할 거 뭐 있겠슴까."
그럼 무슨 말을 해야하지. 입만 벙긋 벙긋거리고 있으니 키세상이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한 걸까.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무슨 얘기를 해야하는지도 모르겠고. 생각해보면 키세상과 나 사이의 공통화제는 '아오미네', '모모이', '농구'. 이 정도였다. 확실히 말해 대화를 나누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키세상이 좋아하는 화제는 뭐가 있을까. 알고 싶다. 그에 대해서 조금 더. 그리고-.
"요즘 아오미넷치 연습 자주 나옴까? 저번에 모못치가 연습 매번 빠진다고 투덜거렸는데."
"네, 뭐. 다음번엔 세이린 이길거라고 의욕이 장난 아니시던데요."
"푸핫, 아오미넷치~ 개과천선했구나~."
푸하하- 웃음을 터트리길래 나도 슬며시 웃음을 머금었다. 심, 심장이 더이상 못 버틸지도 모른다. 저런 화사한 웃음을 바로 옆에서 볼 수 있다니. 폭소를 멈춘 키세상이 아오미네상의 험담을 늘어 놓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공감되는 내용뿐인지라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더니 등 뒤에서 살기와 함께 아오미네상이 등장했다.
"헤에-, 도망가지 말라 했더니 내 험담이냐?!"
"아오미네군! 키쨩이랑 사쿠라이군 괴롭히지 마!"
덤빌 듯 으르렁거리던 아오미네상은 모모이상이 가방을 휘두름에 뻗어 버렸다. 아차, 힘 조절 못 했다. 모모이상이 흠칫 놀라며 중얼거렸다. ……왠지 모모이상의 말에는 무조건 따라야 할 것 같다. 잠시 뒤 아오미네상이 깨어났다. 모모이상을 보며 흠칫-하더니 이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키세상과 1 on 1 삼매경에 빠졌다. 키세상, 즐거워 보인다. 아까 나와 있을 때는? 어떤 표정이었더라. 우울한 기분으로 농구공이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고 있자 옆에서 모모이상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에. 눈에 띄게 우울했던 건가 싶어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건넸지만 모모이상은 손을 내저었다.
"뭔가 기분이 안 좋아보여서. 무슨 일 있어?"
"에, 죄, 죄송합니다. 아무 일도 아니에요!"
"으응,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아, 다이쨩! …이 아니라 아오미네군! 이제 밥 먹으러 가자!"
"오."
"아, 전 갈 곳이 있어서."
점심도 같이 했으면 좋았겠지만 예정이 있던 키세상은 먼저 자리를 떴다. 우우, 아쉽다.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모모이상과 아오미네상의 뒤를 따랐다. 키세상, 다시 만날 수 있으려나…라고 생각했던 게 며칠 전의 일. 키세상은 정말 우연히도, 그것도 마주칠 리가 없다고 생각한 곳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기대했던 만화책이 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그것을 사기 위해 서점에 들렸다. 오늘 사려고 한 책은 bl만화였다. 솔직히 아직까진 남자가 bl만화를 본다는 것에 부정적인 시선이 많긴 하지만 의외로 보는 남자들은 많았다. 나도 그 중의 한 부류. 몇 번이나 들락날락거린 단골이었던지라 아르바이트생이 나를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넸다. 나 또한 인사를 한 다음 bl 만화가 있는 코너로 발걸음을 옮겼다. 신간코너가 아닌 bl코너로 향한 것은 이왕 온 김에 다른 책들도 구경하고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사야지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 여기다. bl코너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여자들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커 보이는 사람도. 회색 후드티에 청색 캡모자를 쓴 남자의 얼굴은 어딘가 익숙했다. 캡모자 밑으로 보이는 것은 금발. …어?
"저……."
"…? 우, 우왓."
화들짝 놀라며 경악 어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 보는 사람은… 키세상이었다. 아, 맙소사. 키세상이 어째서 여기에? 혼란스러움에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자 키세상이 황급히 책을 몇 권 꺼내들고 내 팔을 붙잡아 끌며 카운터로 갔다. …그 와중에도 사는 거군요, 키세상. 엉겁결에 서점 밖으로 끌려 나온 나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은 내 손을 보다가 키세상의 손에 들린 책을 응시했다. 내가 사려던 책도 끼어 있었다. 그러니까 bl만화가. 상황파악이 덜 된 나는 키세상에게 이끌려 결국 근처 공원으로 왔다. 낮인데도 불구하고 의외로 사람은 별로 없었다. 으슥한 곳으로 나를 데려 간 키세상은 벤치를 발견하고 거기에 앉았다.
"…키세상, 부남자셨나요? 아, 죄,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죄송할 일은 아님다. 그러는 사쿠라이군은…?"
"조금 되었는데요…."
"우왓, 정말임까? 동지!"
환한 웃음으로 반기는 키세상을 보고 얼떨떨하게 따라 웃었다. 왠지 웃어야만 할 것 같아서였다. 그러니까 동지라 함은, 나랑 같다는 거고. 그렇다는 건 키세상도 bl만화를 보게 된 건 좀 되었다는 의미? 입을 살짝 벌리고 도출된 결론에 반신반의하고 있을 때 키세상의 얘기는 계속되었다. 저는 누나들이 보여줘서 계속 보다 보니 재밌어져서 저도 사게 되었슴다, 사쿠라이군은? 에, 저는 만화를 좋아해서. 그렇슴까! 전 이 작품이 좋더라구요. 앗, 저, 저도. 그 작가가 그린 작품이 이것 말고 다른 것도 있는데 그것도 괜찮아요. 우와, 몰랐슴다!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다보니 의외로 키세상과 나는 취향이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와, 사쿠라이군이 이렇게 재밌는 사람인 줄 몰랐슴다!"
"에, 재미없던 사람이어서 죄송합니다!"
"…아뇨. 근데 말임다."
주변을 휘휘 둘러보던 키세상이 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아무래도 제가 공인이다 보니 이런 거 사기 힘들거든여. 누나들도 요즘 바쁘고. 그래서 말임다."
말을 꺼내기 어려운지 끙끙 거리는 모습에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기회…라고 생각하는 건 얍삽한 거겠지. 그래도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분좋게 바람이 뺨을 문지른다. 민망한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키세상을 보며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으시다면 저희 집에 놀러 오실래요?"
만화책, 많으니까. 이 말은 덧붙이진 않았지만 그는 알아들었겠지. 그 말에 잠시 얼빵한 표정을 짓던 키세상이 이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미소에 주변이 금색 빛으로 너울거렸다면… 조금 과장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