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바스/황립]단추
※키카사
[쿠로바스/황립]단추
written by. 티토
"이상으로 졸업식을 마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환호성이 들렸다. 어렴풋이 울음소리도 들리는 게 슬픈 건지 아쉬운 건지 해방감을 느끼는 건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교장 선생님이 단상에서 내려 오시는 걸 보고 있던 나를 옆에서 툭툭 치기에 고개를 돌려 보니 감격에 겨워하는 모리야마가 보였다. 자신의 졸업식에도 태연했던 녀석이 왜 이렇게 감격에 겨워 있는 건지. 왠지 모를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봤냐, 카사마츠? 아까 수석으로 졸업한 애 완전 내 이상형이야."
…그럴 줄 알았지. 너는 대학교 2학년이나 되었으면서 어째 그대로냐. 진이 빠진 채 허탈한 웃음을 짓는 나는 상관쓰지 않은 채 모리야마는 벌떡 일어섰다. 좀 기다려라, 바보야. 끝난 직후에는 사진이니 뭐니 해서 많이 혼잡스러웠다. 저 인파에 휩쓸리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그것보다 너가 반한 여자애는 화려한 용모의 금발 남학생에게 교복 두번째 단추를 달라고 요구 중이거든. …금발? 순간 헛것을 봤나싶어 눈을 비볐다. 몇번 눈을 깜빡여봤지만 시야에 들어온 사람은 같았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키세 료타. 그야말로 내가 졸업한지 2년만에 다시 학교를 찾은 이유였다.
"카사마츠?
멍하니 그곳을 보고 있을 때 코보리가 말을 걸었다. 황급히 놀라 고개를 돌리자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모리야마와 대조되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보는 코보리가 보였다. 모리야마가 팔짱을 끼며 나에게 미묘한 시선을 보냈다. 다 알고 있다고 말하는 듯한 그 시선에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거렸다.
"그나저나 이제 얘기해주지? 갑자기 졸업식 참석은 왜?"
"아아, 그냥 농구부 놈들 졸업 축하해주려고."
"작년에 안 갔는데?"
"그럼 작년에 졸업한 하야카와랑 나카무라 등등 애들은 뭐가 되냐?"
…이럴 줄 알았으면 작년에도 참석해두는 건데. 지금 와서 후회해봤자 바뀌는 것은 없지만.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변명을 생각하려다 포기했다. 딱히 변명거리가 떠오르지 않아서였다.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느정도 사람들이 빠져나가 강당 안은 한산했다. 온 김에 선생님 뵙고 갈까. 차마 그 녀석을 만날 용기는 없었던 터라 멀리서 얼굴을 본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가자, 모리야마, 코보리."
"아-, 뭐야, 카사마츠."
"그냥 한가해서 온 거야. 내년이면 우리 대학교 3학년이고. 취업 준비도 해야하니까 바쁘잖아."
"카사마츠, 너는 괜찮은 거 아냐?"
"아아, 그렇지만 너네는 해야하니까. 나 혼자 돌아다니기도 뭐하고. 그래서 같이 오자고 한 거지."
"흐음-."
모리야마의 찌를 듯한 시선을 무시한 채 강당 밖으로 걸어나왔다. 날씨 한번 좋다. 입가에 절로 미소가 띄어졌다. 주변을 둘러보다 한 곳에 인파가 집중되어 있는 게 보였다. 주변의 남학생들이 너무 커서 가운데 서 있는 게 누군지 모를 지경이었다. 요즘 고등학생들은 키가 참 크구나. 농구부이려나. 목을 긁적이다 인파의 중심에 있는 게 누군지 궁금해져서 한발짝 걸어갔다. 혹시 모리야마가 반했던 그 여자애려나. 확실히 인기가 많아보였으니까.
"야마 군, 그럼 농구부를 부탁함다."
…하? 여자일거라는 내 예상은 빗나갔다. 남자놈들이 울먹거리며 서 있길래 당연히 인기 많은 여학생이려니 했는데, 그 녀석이었다. 키세 료타. 황급히 도망가려 했지만 누군가 붙잡은 듯 발을 옮길 수 없었다.
"맡겨 주세요, 키세 선배! 저…, 선배 단추는…."
"에, 단추 말임까?"
키세 주변의 남자 녀석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서로를 의식하는 게 누가보면 연적 사이인 듯 보였다. …아니, 진짜일지도 몰라. 아아, 젠장.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내심 기대하고 있는 놈들의 얼굴이 보이자 당장이라도 달려가 한 대 차줘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하얗게 질릴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단추라. 그러고보니 내 교복 두번째 단추는 키세한테 줬었지. 받을 사람 없으니까 니 녀석이라도 가지라고. 문득 떠올린 생각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 때 키세 녀석 뭐라 했더라.
"필사적으로 지키고 있는 중임다. 줄 사람이 있거든요."
"엑, 누굽니까?!"
"2년 전부터……, 꼭 주고 싶은 사람이 있슴다. 뭐, 여긴 안 온 것 같지…, 어라?"
주먹에 힘을 풀고 나 자신이 한심하게 보여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키세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망했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눈빛에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걸 어떻게 둘러대야하지. 키세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지자 정신이 들었다. 황급히 몸을 돌려 가려고 하자 웃음기 가득한 녀석, 특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엑, 선배! 가시는 검까?!"
멍한 후배 녀석들 사이로 빠져나온 키세는 내 앞에 서서 얼굴을 들이밀었다. 얘는 왜 이렇게 빨라?!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자 키세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계속 실실 웃음을 흘렸다. 아, 진짜. 표정을 굳히며 그 녀석의 이마를 검지손가락으로 꾹 밀었다.
"뭐하는 거냐."
"그야 선배가 오셨으면서 저 보지도 않고 가 버리려고 하셨잖슴까?"
"오든 가든 내 자유거든?"
틱 틱 말을 내뱉으며 계속해서 키세의 이마를 밀었다. 이런 식의 만남은 당황스럽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들이밀어? 키세는 가려고 하는 나를 붙잡아 농구부원들이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뭐하는 짓이야, 이 녀석이. 내가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는 듯 내 어깨를 움켜 쥐는 게 느껴졌다. 이렇게 삼자대면…, 저쪽이 여럿이라 아닌가. 하여튼 얼빵한 농구부원들과 헤실거리는 키세, 어이없다는 표정을 한 내가 한 곳에 모였다. …정말 안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소개하겠슴다. 카사마츠 선배임다!"
"에, 카, 카사마츠?! 정말입니까?!"
"어, 왜, 뭐."
"정말임다. 것보다 선배, 올해 농구부를 이끌어 갈 후배들에게 따뜻한 한 마디 어떠심까?"
"싫어, 내가 왜. 한 대 맞기 전에 이거 놔."
"안 됩니다! 키세 선배를 때리시려거든 저를 때리세요!"
뭐야, 이건 또. 야마 군으로 추정되는 제일 키 큰 남자 녀석이 소리쳤다. 센터인가. 2m가 넘는 듯한 녀석을 위에서 아래로 쓱 훑어 보자 내 어깨를 잡은 키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파, 이 자식아. 손등을 때리자 평소처럼 나사가 하나 빠져 헤실거리며 나를 내려다보는 키세가 보였다.
"선배, 맛있는 거 사주시는 검까?"
"아, 내가 왜? 것보다 모리야마랑 코보리도 같이 왔어."
대답과 동시에 뒤를 가리켰다. 손가락 끝에는 결국 그 여자애에게 대쉬하는 모리야마와 어색하게 그 옆에서 웃는 코보리가 보였다. …결국 대쉬 중이였냐.
"에에, 뭔가 둘 다 여전하시네여."
"응, 성장이 없지."
물론 모리야마만 해당되는 사항이다만.
"모리야마! 코보리!"
"그러니까, 어?"
적극적인 대쉬를 하고 있던 모리야마가 내가 큰 소리로 부르자 뒤를 돌아봤다. 이리 오라는 의미로 손을 까딱 까딱 흔들었다. 나와 키세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코보리가 모리야마의 팔을 붙잡고 이쪽으로 걸어왔다. 나이스, 코보리.
"거의 다 넘어왔는데."
…웃기지 마. 저기 저 여자애, 내가 너 부르니까 안도하고 있거든?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키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키세, 모리야마가 쏜대."
"에, 정말임까? 감사함다, 모리야마 선배."
"…무슨 소리야, 카사마츠."
"데이트 다닐 예정이었을텐데 그럼 돈이 있겠지."
얼빠진 모리야마를 보다 힐끔 보다 이내 후배 녀석들을 보았다. 얼빠진 놈들 여기 더 있었네. 이래서 농구공이나 제대로 잡겠냐. 기강이 해이하잖아.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니 키세가 엉겨 붙었다. …무거워, 이 자식아. 189cm의 남학생이 매달리면 무거워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했냐.
"선배, 왜 그러심까?"
"무거…, 아니다. 그나저나 너 쟤네 교육은 제대로 시켜놨냐. 어찌된게 제대로 인사를 안 해."
"에, 선배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했슴다. 재작년보단 낫다구여."
"재작년이면 하야카와가 주장일 때 아냐?"
…하긴 주장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데 제대로 될리가. 언뜻 보니 확실히 이 녀석을 따르는 것 같긴 하다만. 이 녀석이 워낙 헤실거리고 다녀서 카리스마가 부족한 건가.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고민해봤자 나는 졸업해서 권한 밖이다.
"감독님은?"
"아."
뭐야. 웃음을 참는 키세를 떨떠름하게 보다 앞의 후배들을 보니 얘네들도 웃음 참기 바쁘다. 문득 3학년 때, 토오전에서 토오고교 감독과 라이벌 의식을 불태워-분명 그 쪽은 아니었다만- 하고 오셨던 복장이 떠올랐다. …설마.
"배탈 나셔서 못 오셨슴다."
"…배탈?"
대체 뭘 먹으셨길래.
"감독님, 여전하시네."
"네, 그렇슴다. 오히려 더……."
"그만, 안타까워지려 그래."
"근데 말야. …너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냐."
모리야마의 뜬끔없는 소리에 멍한 표정이 절로 지어졌다. 모리야마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내 어깨를 바라보니 멀뚱 멀뚱 모리야마를 보고 잇는 키세 얼굴이 보였다. …아. 솔직히 멍한 상태로 서 있었던지라 묵직한 어깨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머리 치워!"
"에, 아까까진 가만히 계셨잖슴까."
"아까는 정신이 없었고. 어쩐지 무겁더라니."
"큭. 내가 이런데서 사내 놈들 노닥거리는 것을 보고 있어야 한다니."
저건 또 뭐래. 키세 머리를 밀어내며 모리야마를 흘겨 봤다. 고개가 절로 흔들어진다. 니 머릿속엔 뭐가 들었는지 궁금하다. 대체 어딜 봐서 노닥거리는 걸로 보이는 건데.
"쨌든 난 간다."
"에, 가시는 검까?! 잠, 잠깐만여!"
뭔가 싶어 키세를 보니……. 왜 단추는 다 떼고 있는 거냐. 멀뚱 멀뚱 키세의 행동을 지켜봤다. 다 떼었는지 키세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한테 손을 내밀었다. 내밀어진 손을 보고만 있자 키세가 단추를 쥔 손이 아닌 반대손으로 내 오른손을 잡아 올렸다. 그 손에 단추를 올려 놓은 키세는 빙그레 웃었다. 이건 대체 무슨 상황……?
"저, 선배가 있는 학교 합격했슴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이 있슴다."
"하?"
뜬끔없는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2년 전에 약속했잖슴까. 졸업식날 드릴 말이 있다고."
2년 전? 어렴풋이 기억이 떠올랐다. 키세가 자신의 졸업식날 할 말이 있다며 와 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던 게.
"선배, 사랑함다."
"…장난치냐. 그리고 너, 고등학교 졸업하면 모델활동 재개한다며."
믿기지 않는 소리에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더군다나 이 녀석은 고등학교 졸업하면 모델 활동을 재개한다던 녀석이다. 모델로 돌아간다면서, 그러면서 남자한테 고백이냐. 내가 녀석을, 키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걸까. 이런 내가 불쌍해서 한 말은 아닐까. 만약 그런 것이라면, …… 더 상처였다. 차라리 남자는 싫다, 선배 이상으로 본 적이 없다. 욕하고 멀리 해주라고.
"그럴 검다. 하지만 그건 숨길 이유는 되지 않슴다."
"바보냐."
그 말에 키세가 환하게 웃었다. …정말 바보 녀석이다.
"선배를 처음 본 순간부터."
…웃기고 있네. 그래도 이 녀석이 거짓말할 리는 없겠지. 믿어도 되려나. 오랜시간 참아 왔던 감정이 이내 흘러 넘치기 시작했다. 감정을 추스릴 틈도 없이 눈물은 뺨을 타고 흘렀다.
"너 진짜 바보인 건 아냐?"
"말했잖슴까. 선배를 처음 본 순간부터 바보가 되었다고."
키세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내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뭔가 괘씸하다. ㅏㄴ는 조바심 내고 있었는데 이 녀석은……. 뭐 상관없나. 이어지는 키세의 말에 나 또한 빙그레 웃었다.
"사랑함다, 카사마츠상."
…나도. 고 1 여름, 너의 공식전 데뷔 경기를 보았을 때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