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바스

[쿠로바스/청황]실명

물빛녘 2015. 3. 1. 10:42

※아오키세


[쿠로바스/청황]실명

written by. 티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은 분명 눈을 뜨고 있는데도. 키세는 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얼굴 위로 느껴지는 손은 언제 굳은 살이 배겼냐는 듯 매끄러울 뿐이었다. 울음을 삼키며 눈가를 만지작거렸다. 긴 속눈썹 사이로 자신의 샛노란 눈동자가 자리하고 있을 터였다. 자신이 사랑하는 그가 예쁘다고 해준 자신의 눈동자가. 손을 움직여 한 손은 이마에, 다른 한 손은 코 끝에 가져갔다. 그가 입맞추어 준 곳이었다. 이번에는 뺨에 손을 댔다. 살짝 눌러 보니 말랑말랑한 살결이 느껴졌다. 얼굴을 더듬던 손은 이윽고 입술에 도달했다. 그와 입을 맞추던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입술에는 따스한 감촉은 커녕 따가운 감촉만이 자리잡고 있었다. 머리를 쥐어 뜯었다. 그가 달빛을 받은 것 같다 칭찬해주던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느껴졌다. 이제 다 필요없다. 그는 옆에 없으니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괴로워 하는데도 그는 없었다. 평소라면 자신을 달래 주었을텐데 그러지 않는 걸 보아하니 그는 자신을 떠난 게 분명했다. 그도 그럴테지.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연인, 그것도 남자라면?

 

애써 참고 있던 감정이 넘쳐 흐르기 시작했다. 가슴이 먹먹해 그것을 떨쳐 버리려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옆을 더듬어 손에 잡힌 베개를 던진 후 조그만 수납장 위를 손으로 더듬었다. 유리잔이 손에 잡혔다. 그것 또한 던져 버렸다. 바닥에 떨어져 쨍그랑 소리가 났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더 크게 소리질렀다. 주변을 더듬어봤지만 더 이상 잡히는 것은 없었다. 자신이 무언가 집어 던질 걸 예상이라도 한 듯.

 

"키세 군!"

 

"료타!"

 

어라, 귀에 익은 목소리가 둘씩이나 들려왔다. 하나는 쿠로콧치,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아, 그다. 황급히 허공을 더듬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그가 있었다. 그는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좀 더 확실한 것이 필요했다. 그의 온기가. 아무리 휘저어도 그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자 팔을 축 늘어뜨렸다. 대신에 무언가 통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불안감에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던 중 자신의 머리에 사람의 온기가 전해졌다. 그러나 그는 아니었다. 보이는 것은 없을테지만 습관처럼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왠지 연민 가득한 눈빛이 느껴지는 것 같아 머리에 얹힌 손을 뿌리쳤다. 동정, 연민. 그런 것을 바란 적은 한번도 없었다. 안달난 아이처럼 행동하자 머리 위에서 침울하지만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키세 군, 걱정하지 마세요. 아오미네 군은 유리를 치운 것뿐이니까."

 

"정말임까?"

 

쿠로코는 아무 말없이 키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신이 알던 키세는 이제 없었다. 한 사람이 없으면 불안해하고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가 되어 있었다. 밝은 미소로 주변의 시선을 한 몸에 받던 그는 시력 감퇴로 인해 좋아하던 농구를 그만둬야 했고 모델 일 또한 그만두게 되었다. 그에게 남은 건 그의 연인과 친구들, 가족뿐이었다. 

변하가는 모습에 지친 친구들의 대다수는 연락을 끊었고 가족 또한 한 달에 한 번 찾아올까 했으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연인이 그의 세상의 전부가 되어 버렸다. …그건 좋지 않았다. 쿠로코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런 생활이 지속된다면 두 사람에게 좋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쿠로코의 손길에 얌전히 있던 키세는 갑자기 쿠로코가 손을 떼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내 다른 손이 머리에 얹혀졌다. 좀 전의 손보다 확연히 큰 손이었다. 아, 아오미넷치. 키세가 베시시 웃자 머리 위에서도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잠시동안 키세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갑자기 떨어졌다.

 

"음료수 사올테니까, 얌전히 있어. 곧 돌아올게."

 

"응, 알았슴다. 얼른 와여."

 

키세는 곧 돌아올거라는 말에 얌전히 이불을 덮고 누웠다. 그 모습에 쿠로코는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 등을 돌려 나가려는 아오미네와 눈이 마주친 쿠로코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힘들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그 정도가 되기 전까지 말리고 싶었건만. 눈빛에 담긴 말들을 눈치챘는지 아오미네는 쓰게 웃으며 손을 내젓고는 문을 열고 나갔다.

 

"아오미넷치, 언제 옴까?"

 

아오미네가 나간 지 조금 흘렀을까 침묵을 뚫고 키세의 목소리가 들리자 조용히 책을 읽던 쿠로코가 고개를 들었다.

 

"곧 오실 겁니다."

 

쿠로코의 말에 키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복도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에 환하게 웃었다. 조금 묵직하면서도 터덜 터덕 걸어오는 것은 분명 아오미넷치였다.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문이 있을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오미넷치!"

 

"엉."

 

아오미네는 품에 한가득 음료수캔을 안고 키세와 쿠로코가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키세는 시력을 잃은 대신 청각이나 후각이 월등히 좋아졌다. 그래서인지 발걸음 소리도 구별이 가능한 듯 싶었다. 처음엔 알아차렸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지금은 익숙한터라 태연하게 대답한 후 침대 옆 의자에 앉아 품에서 캔 하나를 집어 쿠로코에게 건넸다. 받아드는 모습을 본 뒤 키세가 좋아할 음료수를 골라 캔을 땄다. 특유의 소리가 들리자 키세가 헤죽헤죽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요 놈. 아오미네는 쓴웃음을 지으며 키세의 손에 캔을 쥐어 주었다. 받자마자 냉큼 마시는 모습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질 때 즈음 키세의 마른 몸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입 안으로 흘러 들어오던 음료수가 쓰게 느껴졌다. 언제 저렇게 말랐더라. 전에도 말랐지만 그 때는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매였다. 그러나 지금은……. 밥이라도 잘 먹어야 하는데 극심한 불안감에 시달리는 그가 밥을 입에 넣으면 곧바로 뱉어내니 별 도리가 없었다.

 

"아오미넷치는 저 떠나지 않을 검까?"

 

아오미네는 키세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자주 찾아오지도 않는 부모님, 그리고 며칠 전 그에게 독설을 퍼붓고 가 버린 고등학교 때 친구가 떠오른 듯 했다. 너의 그 태도는 질린다, 했던가. 키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떠나지 않아."

 

"난 이제 아오미넷치 없음 못 살아여."

 

불안한 듯 애처로이 자신에게 매달린 키세를 보며 아오미네는 손을 뻗어 키세를 감싸 안았다. 절대로 자신은 떠나지 않는다. …키세가 없으면 못 사는 건 자신도 마찬가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