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바스/립황]팀
※카사키세
[쿠로바스/립황]팀
written by. 티토
다리부상으로 인한 에이스의 부재. 우리는 최선을 다 했지만 결국 패배했다. 그리고 나는 그 뒤로 한동안 그를 만날 수 없었다.
그 녀석에 대한 첫인상은 그저 샤랄라하는 재수없지만 재능많은 1학년 후배. 소문처럼 오만한 그 녀석은 마치 흰 옷에 묻은 색색깔의 물감같았다. 확연히 튀고 어느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다는 점이 딱 들어 맞았다. 그게 눈에 거슬렸던 나는 녀석이 농구부에 입부하던 그 날 크게 꾸짖었다. 선배에게 경의를 표하라. 그 말을 오만한 모델 녀석이 어떻게 받아 들였을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거만한 녀석은 자신을 굽혔다. …재능에 대한 자부심은 여전했다만.
세이린과의 연습시합은 프라이드가 높았던 녀석에게 큰 변화를 가져왔다. 병행해오던 모델 일도 그만뒀을 정도면 진 게 그렇게도 쇼크였나 보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주장의 입장으로서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얼룩에 불과하던 물감은 붓을 통해 화려한 무늬를 만들어냈다. 자신만 알던 녀석이 모델 일을 접어두고 연습에 매진했다. 그러한 에이스의 모습에 다른 부원들마저 열의에 불타올랐다.
너무 부담을 줬을 지도 모른다. 악착같이 연습에 임하던 녀석은 기적의 세대 에이스인 아오미네 다이키를 카피해내는데 성공했지만 그에 따른 대가는 컸다. 아직 완성되지 못한 몸으로 과한 연습을 견디고 시합에 임하던 녀석은 결국 다리부상을 입고 말았다. 후쿠다와의 시합에서 하이자키로 인해 부상은 더 심각해졌다. 무리한 상태로 기적의 세대마저 카피해냈다. 세이린과의 공식경기에서도. 녀석은, 키세는 심각해진 부상으로 3, 4위전에 참가하지 못 했다. 미도리마 신타로가 있는 슈토쿠와 키세 료타가 빠진 카이조의 경기는 뻔하게 카이조의 패배였다. 그렇게 내 마지막 고교 선수생활은 끝났다. 최선을 다 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었다. 하지만 녀석은 아니었던 걸까.
당연한 얘기지만 올해 윈터컵을 마지막으로 3학년은 은퇴했다. 주장의 자리를 나카무라에게 넘겨준 뒤 나름대로의 애정을 담아 힘내라는 말을 해줬다. 그리고 녀석의 금발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3학년이 은퇴함을 알리는 자리에 녀석은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괘씸한 건 아니었다. 토오전이 끝난 다음 에이스로서의 실책을 얘기하던 그 녀석 얼굴이 떠올랐다. 혼자서 감내하고 있는걸까. 마지막 경기에 함께하지 못했던 에이스로서의 자신이 한심했던걸까.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수험생으로서 공부를 하는 틈틈히 후배 녀석들이 연습하고 있는 체육관을 찾아갔지만 금발은 여전히 없었다. 나카무라의 말에 따르면 연습에 참여하지 않는 날이 많다고 했다.
애써 녀석을 찾으러 다니지 않았다. 녀석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다고 생각했다. 농구가 싫어졌다고 해도 나는 어쩔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은퇴한 전 주장이어서가 아니라 녀석의 삶에 간섭할 권리가 없어서였다. 농구부를 은퇴한 지금 나와 그는 남남이었다. 그렇게 졸업을 앞둔 지금도 키세를 만난 적이 없었다.
졸업식 당일. 혼잡한 강당 안을 빠져 나와 체육관으로 걸어갔다. 3년 내내 연습했던 곳이다. 그만큼 정도 많이 들었다. 새삼스레 사색에 빠진 내가 우스워 바람빠진 미소를 지었다. 그래봤자 녀석은 없겠지만. 며칠 전 나카무라로부터 키세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너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기회가 된다면 너랑 다시 농구하고 싶은데. 체육관 안에서 탕탕 공을 바닥에 튕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의아함을 띄고 안을 들여다 봤다. 환한 금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금발을 바람에 흩날리며 농구를 하고 있는 것은 키세였다. 녀석이 날 발견했는지 눈이 커졌다. 그렇지만 이내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공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장난스런 목소리.
"농구 하지 않겠슴까, 선배."
*
"너 요즘 연습 안 나온다던데."
"에에, 나카무라 선배한테 들은검까."
평이한 어조로 대꾸한 키세는 입을 다물었다. 뚫어져라 녀석의 얼굴을 쳐다보니 쳤다는 듯 두 손을 들며 연극조로 내 의문에 답했다.
"아무래도 부담스러워서여. 그래서 이렇게 혼자."
공을 가리키며 짓궂은 미소를 내보이며 말한 녀석은 다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자신을 보호하려는 듯한 몸부림. 나는 녀석의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 아픔다! 키세의 투덜거림에 한쪽 입꼬리를 살며시 올리며 대꾸했다.
"아프라고 때린건데."
"우아, 너무함다! 오랜만에 봤는데 이러는 검까!"
"그래, 오랜만이지. 나 연습 몇 번이나 보러 왔는데 니 녀석은 없더라?"
금붕어라도 되는 양 뻐끔거리던 녀석이 입을 꾹 다물었다. 정말 손 많이 가는 녀석이구만. 한숨을 내쉰 나는 바닥에 드러누웠다. 힐끔힐끔 녀석이 나를 살피는 것이 느껴졌지만 무시하고 눈을 감았다.
"어이, 키세."
"네?"
"팀이 뭐냐."
"에, 팀이여?"
뜬끔없는 물음에 키세가 당황한듯 음이탈을 내며 물었다. 그렇게 뜬끔없었나. 팀이라, 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글, 글쎄여."
"…궁리하더만 답이 안 나왔냐."
"우우, 모르는 걸 어떡함까."
"팀은 에이스가 지고 가야할 짐이 아니야. 내가 말한 적 있었지. 에이스는 팀의 승리를 향해 달리면 된다고. 팀의 실책을 떠맡는 것은 주장의 몫이라고. 아무도 널 탓하지 않아. 오히려 감사하고 있어. 그 때 그만큼 올라갈 수 있었던 건 네가 카이조에 있어줬기 때문이라는 걸 모두 알고 있어. 부담가질 필요없어, 바보야. 너는 그냥 하면 돼. 그러니까 연습 빠지지 마라, 멍청아. 대학가도 너 제대로 연습하나 감시하러 올거니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상체를 일으켜 무릎에 얼굴을 묻고 혼자 울고 있는 녀석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토닥토닥 녀석이 속 안의 울분을 쏟아낼 때까지 아무말없이 녀석의 옆을 지켰다. 한참을 울던 키세가 고개를 들었다. 퉁퉁 부운 모습에 푸핫 웃으면서 놀렸다. 모델이라는 녀석이 꼴이 그게 뭐냐. 울린 건 선배잖슴까. 입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리던 녀석이 살짝 웃으며 중얼거렸다. 고마워요,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