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바스/청황/청금/립황]같은 곳에 서서
※아오키세, 아오이마, 카사키세
[쿠로바스/청황/청금/립황]같은 곳에 서서
written by. 티토
한 눈에 반했다. 단박에 사랑이라 느꼈다. 중학생이었던, 어렸던 우리는 그렇게 사랑이라는 것을 시작했다.
언제까지나 같은 곳에 서서 같은 곳을 바라볼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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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눈에 반했다, 라는 건 믿지 않았다. 드라마에 흔히 나오는 가슴이 간질간질해지는 감정따윈 딱히 알고 싶지도 않았을 뿐더러 느낄 일도 없을 거라 생각했다. 첫 눈에 반한다는 거, 얼굴보고 반한다는 거잖아. 그 사람이 어떤 성격의 소유자인지도 모른 채 반한다는 게 말이 되는 걸까.
ㅡ라는 건 예전에 가졌던 생각. 어릴 때부터 고수해오던 신념에 가까운 생각은 그를 본 순간 무너졌다. 농구공에 머리를 맞아 순간 정신이 이상해서일지도 모르지만 어찌되었든 내가 그에게, 아오미네 다이키라는 사내에게 한 순간 마음을 빼앗겼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리라. 햇볕에 지나치게 그을린 피부에 땀냄새 나는 그가 뭐가 그리도 멋져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심장이 덜컥 거렸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다 그가 있을 농구부로 발걸음을 옮겼던 게 중2 봄날의 일. 체육관에서 봤던 그의 플레이에 넋을 놓고 있다가 그 날 부로 부장을 찾아가 입부 신청서를 냈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조금이라도 더 선명히 보고 싶었기에.
사랑이라는 감정을 믿지 않던 나였지만, 그 순간의 감정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건 소위 말하는 운명같은 사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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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소문 속의 여자애들의 우상이 누군지 궁금해서? 글쎄, 그것도 그랬던 것 같고. 아마 그의 얼굴이 보고 싶었던 것 같다. 얼마나 잘 생겼길래 여자애들이 사족을 못 쓰나 궁금해서가 가장 적절한 답이지 않을까. 누가 들으면 자랑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소꿉친구인 사츠키는 남자애들이 소개시켜 달라고 할 정도로 한 미모를 했기에-나는 잘 모르겠다만- 나름대로 나는 눈이 높은 편이었다. 그래봤자 보통에서 위겠지, 라고 생각했었다.
다만 그건 농구공을 던져 그의 이목을 집중시킨 후 봤던 그의 얼굴을 본 순간 철회. 이게 정말 인간의 얼굴이냐 할 정도였다. 태연함을 가장해 인사를 건넨 후 농구공을 받아 들고 체육관으로 뛰어갔다. 나, 떨고 있진 않았겠지.
요새 애들은 조숙해서 유치원 때, 소학교 때 한다는 첫사랑도 한 번 못 해봤던 나였지만 심장이 쿵쾅쿵쾅거리고 계속 그 사람만 생각난다는 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 것인지는 알았다. 아, 이게 사랑이라는 감정이구나. 찡그린 표정의 그를 웃게 해주고 싶었다. 계속해서 뛰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해 잡념을 떨쳐 버리기 위해 연습경기를 하고 있던 무리에 뛰어 들었다.
그걸 통해서 그 녀석이 농구부에 입부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깜짝 놀랐다.
앞으로 내 심장은 무사할지 걱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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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합숙 마지막 날이었다. 성공리에-라고 말하는 건 뭐하지만 무탈하게 끝났으니- 합숙을 마친 것을 축하하며 불꽃놀이를 하게 되었다. 하늘을 수놓는 불꽃을 보며 감탄사를 터트리고 있을 때였다. 예상치 못한 고백을 받았다. 그것도 그에게.
굉장히 얼빵한 표정을 지었겠지만 다행인지 주변은 어두웠다. 안 그랬으면 붉어진 얼굴을 숨기지 못해 안절부절했을테니까.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그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폭죽소리와 함께 잠깐의 입맞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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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고백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남자와 남자이니만큼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했던 내가 조바심을 냈던 건 그를 좋아하는 게 나뿐이 아니었으니까. 언젠간 다른 녀석의 손에 넘어간다고 생각하니 여유라는 게 사라졌다. 그래서 부원 모두가 불꽃놀이에 정신 팔려 있을 무렵 그를 따로 불러냈다. 어두워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어울리지도 않게 얼굴이 붉어진 모습을 보여줄 뻔 했다.
놀란 녀석이 입만 쩍 벌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주저하다가 손을 내밀었다. …그나저나 저 녀석은 놀란 모습도 예쁘냐.
내민 손에 온기가 느껴졌다. 하늘에서 터지는 불빛으로 어렴풋이 보이는, 살짝 고개 돌린 그의 뺨은 붉게 물들어있었다. 이것도 예정한 바는 아니었다만 분위기에 취해서인지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가져가 대었다.
아아, 심장 터질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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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데이트였다. 생애 첫 데이트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의 첫 데이트. 이때까지 사귀었던 여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며칠 전부터 기다리던 데이트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머리를 만지기도 하고 안경을 썼다 벗었다를 반복하고 옷장 안에 있던 옷들을 침대에 늘어놓고 패션쇼를 하는 등 부산하게 준비를 했다. 작은 누나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데이트하니, 라고 물었다. 그렇게 티 나나. 헤죽 웃으면서 응, 이라고 대답했다. 아아, 정말 좋아.
…비록 데이트 목적이 농구화 사러가는 것이기는 하다만. 뭐, 아무렴 어때. 주말에도 같이 있을 수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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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말 바보입니다……. 농구화 사러 가자, 가 뭐냐고. 정말 데이트 신청하는 녀석 중에 이렇게 한심한 걸로 신청하는 건 나밖에 없을 거다. 그 녀석은 여태까지 많은 데이트를 해왔을 게 분명한데, 얼마나 한심하게 보였겠냐고. 침대를 뒹굴며 한심했던 내 모습을 비웃었다. 머리가 정전기로 인해 부스스해진 것을 거울로 확인한 후 욕실로 들어갔다. …일단 찬 물을 맞으면서 정신 차리는 게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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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데이트는 무사히 마쳤다. 농구화를 산 뒤 헤어지기 싫어 아이쇼핑을 하러 돌아다니던 우리는 우연히 영화관 앞을 지나쳤다. …아니, 지나치려 했는데 내가 그를 붙잡았다. 마침 보고 싶었던 영화가 있었는데, 같이 봐 주면 안 되냐고 조심스레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세.
팝콘을 사러 그가 자리를 떴다. 매표소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서있을 때 주변에서 키세 료타가 아니냐고 수근거리는 소리에 애써 모른 척 시치미를 뚝 떼었다. 무도수 안경을 살짝 치켜 올린 후 영화관 직원 앞에 섰다. 그러니까 저 영화 표 두 장 주세요, 라고 말하니 직원도 혹시 키세 료……, 라고 묻길래 아니라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일이나 하시죠. 표를 받아든 후 팝콘을 사들고 기다리는 그에게 다가갔다.
무슨 영화? 액션영화임다.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며 안으로 들어갔다. 영화 선택은 좋았다. 적절한 액션씬과 적절한 로맨스. 그리고 그와 함께 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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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그가 보고 싶은 영화가 있어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아이쇼핑만 하다가 헤어질 뻔했다. 첫 데이트가 순식간에 끝날 뻔.
내가 팝콘을 사겠다고 하자 그는 자신이 표를 산다고 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팝콘을 사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주변에서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힐끔 뒤를 보니 그는 주변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걸로 인해 다른 사람들은 긴가민가하며 말을 걸까 말까 주저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하, 웃음이 절로 나왔다. 너희들의 그 '키세 료타'가 내 애인이라고. 어깨를 주욱 펴고 이상하게 나를 보는 직원에게서 팝콘과 콜라 두 잔을 사 들었다.
그나저나 무슨 영화지. 표를 사 들고 걸어온 그에게 물었다. 액션영화임다. 싱긋 웃으며 그가 대답했다. 액션 영화 좋아하거든요, 라고 덧붙인 그는 내게서 콜라 하나를 받아들어 주욱 마셨다. 나도 액션 영화 좋아하는데, 애써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우와, 진짜요? 똑같다ㅡ. 환한 미소와 함께 그가 그렇게 말하자 심장이 쿵 떨어질 것 같았다. 우, 우와……, 잠시라도 방심하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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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변했다, 라고 느낀 건 언제부터였나. 순수하게 농구바보이던 그는 어디로 간걸까. 공식전때의 그는 뭔가 이상했다. 혹시 기분탓일까 싶어 그와 친한 쿠로콧치한테도 물어봤지만 똑같은 감상평이 돌아왔다. 강해지면 더 재밌어지는 게 아니었던걸까. 나를 대하는 건 평소와 비슷했지만 농구에 관해서는 달랐다. 아냐, 이건 정말 아냐. 내가 좋아했던 건 농구를 좋아하고 열심이던 그였다. 이렇게 변해버린 그에게 더 이상 가슴은 두근거리지 않았다. 아아, 조금 변했다고 이렇게 마음이 쉽게 변해버리는 걸까. 어색한 내 모습에 쓴 웃음이 흘러 나왔다. 자조적으로 웃던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나도 농구가 지겹다는 느낌이 뭔지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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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디션이 좋다, 일 뿐이었다. 그러나 올해도 잘 부탁한다던 상대는 포기한듯 경기에 임했다. 지금, 장난, 치는 거냐고. 어이없음에 그를 돌아보자 '괴물'이라는 말이 돌아왔다. …아아, 젠장. 이게 뭐가 즐거워. 이럴 줄 알았으면 연습에 열심히 임할 필요는 없었는데. ……연습? 그렇구나, 내가 연습을 안 해도 나를 따라올 사람은 없어.
그는 여전히 좋다. …아니,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건 마치 그저 의무감에ㅡ.
1 on 1하자고 조르던 그가 좋았는데 지금은 그저 귀찮을 따름이다. 영원하리라 믿었던 감정은 결국 변해버렸는가. 변해버린 내 모습에 쓰게 웃었다. 그렇지만 그건 그 때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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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조에 진학했다. 이유는 교복 색. 좋아하던 그의 색. 바다같은 색에 매료되어 정신차리고 보니 카이조에 입학을 한 상태였다. 당연한 거지만 카이조 농구부에 스카우트해서 오게 된 나는 체육관으로 향했다.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능력만이 중요할 뿐. 그렇게 오만방자하게 굴었던 나를 카사마츠라는 사람이 꾸짖었다. 넌 카이조의 1학년 키세 료타다. 그 말이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들었다.
나는 카이조 농구부의 1학년 키세 료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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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오에 진학했다. 이유는 간단. 연습을 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뭐 잔소리꾼 사츠키가 따라왔긴 했다만 그러던가 말던가. 옥상에 들어누워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 때만 해도 그랑 같은 학교에 진학할 거라 생각했는데. 매일 얼굴을 보며 행복할 거라 생각했는데 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카이조, 라던가. 카나가와까지 간 그는 이제 정말 나와 멀어졌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했는데, 이 경우는 반대인가.
마음이 멀어지면 몸도 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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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세, 무리하는 거 아니냐. 세이린과의 연습시합에서 진 후 모델 일도 그만두고 연습에 열중하던 나에게 카사마츠 선배가 말했다. 괜찮슴다, 다음번에 리벤지해야하니까요. 경쾌하게 대답한 내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선배는 핫, 하고 웃으며 나에게 발차기를 날렸다. …어째서?! 얼빵하게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선고하듯 카사마츠 선배가 말했다. 너무 과하게 해도 안 좋아, 조금 쉬도록 해, 바보 녀석같으니라고. 그렇게 강제로 연습 중지 당했슴다……. 우울한 표정을 띄우고 쉬고 있던 모리야마 선배에게 가서 꿍얼거렸다. 그러자 선배는 푸하하 웃음을 터트리셨다.
그게 그 녀석 나름대로 생각해주고 있는 거야, 뭐 연습도 과하면 독이 될 수도 있으니까. 여자만 밝히던 모리야마 선배에게 나온 말에 감탄사를 내뱉다가 문득 카사마츠 선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약간 붉어진 귓볼. …어, 어라? 열이 볼로 몰리는 기분이 들어 양손을 뺨에 가져갔다. 어라, 너 빨갛다?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모리야마 선배의 말은 뇌로 전달되지 않고 다른 귀로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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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녀석 연습 너무 안 한다고요, 에이스라지만 너무 오냐오냐하시는 거 아닙니까?! 분하다는 듯 씩씩거리며 와카마츠-선배라는 칭호따위 붙이지 않는다-가 말했다. 그러자 음험한 안경잡이는 단상에 누워 빈둥거리는 나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 웃음 뒤에 들려온 말은 더 가관이었다. 냅두레이, 경기 때 잘 하면 되는 기다. 관서 사투리로 흥분한 와카마츠의 말을 자른 주장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히죽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떨떠름해진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와카마츠의 손에 들려 있던 공을 빼앗아 골대로 던졌다. 공을 빼앗겨 쨍알거리던 와카마츠는 내가 던진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골대에 매끄럽게 들어가자 입을 다물었다.
능력주의. 베베 꼬인 녀석들이 가득한 이 곳도, 실력만이 중요한 이마요시라는 사람도, 감독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아니, 오히려 나란 녀석에게는 딱일지도 몰라. 다시금 이마요시 상과 눈이 마주쳤다. 피하지 않고 나 또한 피식, 웃어줬다. 그 바람에 그 사람의 눈동자가 살짝은 보인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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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하이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여전했다. 독보적인 플레이도, 자신감 넘치는 그 자신도 뭐 하나 바뀐 게 없었다. 그걸 보고 나는 안심을 했던가, 실망을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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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붙을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그게 고교 진학 후 첫 공식경기에서일 줄이야. 녀석은 달라져 있었다. 테츠네 학교와 했던 연습경기의 영향인가. 그가 나를 카피했단 사실을 놀라웠다만 그 뿐. 마지막 실수는 정말 눈 뜨고 못 봐줄 정도였다. 내 농구에는 동료에게 의지하는 것 따윈 없어, 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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졌다. 눈물이 끊임없이 흘렀다.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서지 못 하는 나에게 카사마츠 선배가 손을 내밀었다. 선배가 일으키다시피 해서 일어선 나는 선배에게 기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아, 나는 아직도 그를 뛰어 넘을 수 없는 걸까. 그의 농구를 좋아했다. 그를 동경했다. 그를 사랑했다. 그렇지만 그건 이제 끝이다.
아오미넷치와 나의 인연은 여기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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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겼다, 해도 기쁘지 않았다. 그가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내게 손을 뻗을 권리는 있는 걸까.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가끔 만났다. 그렇지만 그건 의무감에서 나온 것일뿐 두근거림은 배제된 담백한 관계였다. 가끔 만나서 데이트같은 걸 하고 관계를 가진다. 이런 게 연인이라는 건 맞는 걸까. 괜찮냐는 이마요시 상의 물음이 들려왔다. 아니, 괜찮지는 않다. 그렇지만 이제 괜찮아져야 한다. 첫사랑이었다. 한 눈에 운명이라 믿었다. 그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내 감정을 과신했다.
키세와 나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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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중 2 봄날 운명처럼 만났고, 사랑에 빠졌다. 운명이라 믿었다. 같은 곳에 설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우리는ㅡ.
ㅡ우리는 같은 곳에 서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