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바스/청황]시선의 끝
※아오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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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바스/청황]시선의 끝
written by. 티토
머리가 웅웅 울렸다. 지직거리는 노이즈 속에 간혹 아오미네라던가 다행이라는 말이 섞여 들어왔다. 살아있는 걸까. 아니면 천국? …그럴리가. 아무리 생각해도 천국에 올만큼 착한 일을 한 적이 없었다. 조금은 착하게 살걸 그랬나. 지금 와서 후회해봤자지만 그래도 후회가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나저나 여기가 천국이 아니라면 대체 어디?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올렸다. 흐릿하게 흰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천장? 지옥이나 천국이나 천장이 있는 곳인가. 뭐 그럴 수도 있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물 먹은 솜인 마냥 도통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몸을 일으키는 것을 포기한 나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깬 건가."
귀익은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시야에 초록빛이 들어왔다. 아.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항의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못 들은 척 시치미를 뗐다. …어? 갑작스레 머리속을 스친 생각에 눈을 다시 떴다. 초록색 머리카락에 안경을 쓴 미도리마가 보였다. 저 녀석이 왜 여기있는 거지. 멍하니, 혹은 뚱하게 녀석을 바라보자 심통이 난건지 싸늘하게 나를 내려다봤다.
"미도리맛치, 상황은 어떰까?"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미도리마에게 건넨 목소리는 키세였다. 키세가 여기에? 황급히 상체를 일으키려 했지만 몸은 마음을 배반했다. 온 몸의 근육이 쑤셔서 도저히 일어나기 힘들었다. 미도리마는 테이핑된 왼쪽 손가락으로 안경을 치켜 올리며 특유의 말투로 내가 깨어났음을 알렸다. 그러자 함박웃음을 지으며 키세가 얼굴을 내 얼굴 위로 내밀었다.
"아오미넷치, 괜찮슴까? 아, 말할 수 있슴까? 어디 많이 아파여? 정말~ 제가 얼마나 놀랬는 줄 아심까?"
"……야, 하나만 물어."
내 입에서 냉담한 말이 튀어 나갔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는지 키세가 손뼉을 짝 치며 말할 수 있어서 다행임다, 라고 경쾌한 어조로 말했다.
"아, 맞다. 의사 선생님이 그러셨는데 며칠 치료하면 퇴원해도 된다고 함다. 여태껏 차에 치여도 이렇게 멀쩡한 사람은 없다고 하셨슴다! 역시 아오미넷치!"
그 뒤에 키세가 조잘조잘거린 말에 따르면 차에 세게 치인 것치곤 가벼운 타박상만 입어 며칠 입원해 있으면 괜찮다고 한다. 근육통은 단순히 근육이 놀래서 그런거지 풀어주면 운동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아주 멀쩡한 상태라는 것까지 덤으로 알려준 키세는 이제 간다며 몸을 돌려 걸어가는 미도리마를 문 앞까지 배웅했다. …그럴 거면 왜 배웅하러 간다고 나선 건지. 침대 옆 의자에 앉은 키세는 히죽 웃더니 좀 전의 수다를 계속 이어나갔다.
"여기 특실임다! 아카싯치한테 연락했더니 여기로 따악! 역시 아카싯치죠? 아, 쿠로콧치는 조금 있다가 온다고 했슴다. 모못치는 지금 의사 선생님이랑 대화 중임다! 근데 많이 아픔까? 그래도 그 정도인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구요. 기적이라고 그러셨다니까요. 아오미넷치가 차에 치였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정말 가슴이 철렁했슴다. …잠깐, 듣고 있어요, 아오미넷치?"
쉴 틈없이 이어지는 언어의 홍수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자 키세가 짐짓 삐졌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잠깐. 깨어난지 얼마 안 된 사람한테 뭘 바라는 거야. 묘한 대치가 병실 안에서 이뤄지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총 총 총 걸어오는 소리로 짐작했을 때 몸이 가벼운 여자애의 발걸음이었다. 금방 나는 그 발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키세에 의해서.
"앗, 모못치!"
"미안, 늦었지, 키쨩?"
"으응, 아님다. 자, 그럼 전 가보겠슴다. 몸조리 잘 해여."
한바탕 소란을 일으킨 장본인은 사츠키의 등장으로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퇴장했다. 아직까지도 살아있다는 현실이 실감나지 않은 나는 덜컥 소리를 내며 의자에 앉은 사츠키를 바라보았다. 화난 표정. 언어의 홍수에서 살아났다 싶었는데 잔소리 폭격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차하면 아프다는 걸 핑계로 흘려들으려 했는데 딱히 잔소리할 생각은 없었는지 한숨소리가 머리맡에서 들려왔다. 왠 한숨이냐, 병실에서 기분나쁘게. 그런 의미가 담긴 눈빛을 보내니 사츠키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몸은 어때, 아오미네 군?"
"무거워."
"그래도 그만하니 다행이야. 부모님은 저녁 즈음 오신대. 아무래도 중간에 빠져나오긴 힘드신가봐."
"아아. …나 잔다."
"응, 잘 자."
갑작스레 몰려오는 졸음에 결국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노란 머리카락. 키세, 라고 조심스레 묻자 빙긋 웃으면서 놀러왔슴다, 라고 녀석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창문을 보니 아직까진 환한 하늘이 보였다. 몇 시지? 내 의문을 눈치챘는지 키세가 오후 6시라고 말했다. 연습 끝나자마자 바로 왔다며 푸흐흐 웃던 녀석은 턱을 괴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또다. 또 키세의 시선은 하늘을 향했다. 하늘에 뭐라도 있는 걸까 싶어 하늘을 뚫어져라 쳐다봤지만 평소와 같은 하늘이었다.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동동 떠 있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일상적인 하늘. 놀러왔다던 녀석은 병실에 있는 내내 하늘만 쳐다보다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가버렸다.
*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키세가 찾아왔다.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미도리마, 사츠키, 테츠보다도 자주 오는 녀석에게 한가하냐고 물었지만 전 바쁜 몸임다,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그 바쁜 몸이 왜 얼굴도장을 찍고 있는 거냐고. 내심 기대하려는 마음을 접으며 물었다. 그렇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싱긋 웃을 뿐. 키세는 음료수 한 상자를 마침 병실에 있던 사츠키에게 내밀었다. 고마워, 키쨩! 사츠키의 밝은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창문으로 돌렸다. 창문에 비친 키세는 오늘도 하늘을 보고 있었다. 저 하늘에 정말 뭐라도 있는 걸까. 어제와 다른 점이라면 조금 구름이 많이 꼈다, 라는 정도였다.
"아, 나 잠깐 어디 좀 다녀올게."
볼을 살짝 붉히며 사츠키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특실이었던지라 안에 화장실이 있긴 했지만 사츠키는 흘낏 그곳을 보다가 이내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병실 문을 나섰다. …화장실이 아니었나. 딱 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키세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근처에 남자 둘이 있는데 화장실 가긴 민망했나 봄다. 먼 곳까지 나가게 하고 괜히 미안하네여."
사츠키가 여기 화장실을 안 쓴 건 아무래도 여자의 심리였나 보다. 뭐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나는 알 수 없었다만. 키세의 말을 끝으로 침묵이 맴돌았다. 침묵을 견디지 못한 나는 눈동자를 굴려 키세를 바라보았다. 역시나 녀석의 시선이 또 하늘을 향해 있었다.
"…야."
"네?"
잠에서 깬 듯 흠칫 놀라며 키세가 되물었다.
"너 뭐 보고 있냐."
"…뭐냐니, 하늘이여?"
"그러니까 하늘에 뭐 있냐고. 맨날 하늘만 보고 있고."
말을 하며 키세의 얼굴을 확인하니 붉어져 있었다. …어라?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 머뭇거리던 키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눈치챘슴까?"
"……내 시선은 니 놈을 향해 있거든."
돌직구에 눈을 깜빡거리던 키세가 풋하고 웃었다. 숨 넘어갈 듯 웃던 녀석은 이내 침대시트에 얼굴을 파묻었다. 얼굴을 가려버려 키세의 빨간 귀만 눈에 들어왔다. 신음소리처럼 가느다랗고 조그만한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같으니까."
"어?"
얼빵한 어조의 되물음에 키세가 고개를 들어 내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파란 색이 마치 당신같으니까."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하늘을 보는게 나같아서? 그건 무슨 의미? 머리를 풀가동시켜 의미를 해석해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뭔가 탁, 하고 막힌 느낌이었다. 결국 의미 파악하는 것을 포기한 나는 해답을 요구하듯 키세의 호박빛 눈동자를 응시했다. 키세가 싱긋 웃었다. 붉은 입술 사이로 들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오미넷치 시선 끝에 제가 있듯, 저의 시선 끝에는 당신이 있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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