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바스/화청]너하고 나

쿠로바스 | 2015. 3. 1. 12:23
Posted by 물빛녘

※카가아오

 

[쿠로바스/화청]너하고 나

written by. 티토

 

 

 

 아, 이건 좀 아닌 듯. 카가미는 침대에 널부러진 남자를 보고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술에 떡이 되어서 들어왔냐. …이건 사람이 아닌 거 같은데. 발로 외투도 채 못 벗은 아오미네를 밀었다. 끙, 소리를 내는가 싶더니 그대로 입을 쩝쩝 다시며 잠이 드는 녀석에 기가 막혀 얼굴을 발로 눌러줬다. …어, 그래도 안 일어나네. 이제는 경탄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카가미는 어깨를 으쓱하며 아오미네의 외투를 벗겼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떡이 되도록 이 녀석한테 먹인 건지. 겉보기완 다르게 술에 약한 아오미네의 등짝에 손바닥을 날려준 뒤 일어섰다.

 

 일단 해장국이라도 만들어 둬야 할까. 앞치마를 둘러 맸다. 정말 저 녀석이랑 동거하면서부터 성가신 일도 많다니까. 아, 부엌에서 한숨은 좀 그런가. 어차피 같이 살자 한 것도 자신이었고. 아아, 어째서, 였더라. 언제부터 저 녀석이 좋아졌는지. 처음 붙었던 인터하이에서? 글쎄, 그건 아니었던 것 같고. 다시 붙었던 윈터컵? 아, 그 때는 조금 그랬을 지도? 좋다, 라고 느낀 건 언제부터였나.

 

 아, 지금 이게 중요한 건 아니지. 카가미는 냉장고에서 콩나물을 꺼냈다. 콩나물국이면 되겠지.

 

 라디오를 틀었다. 경쾌한 남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익숙한 목소리인데. 키세냐. 그러고보니 쿠로코한테서 들었던가. 라디오 방송 진행? 이것저것 주절거리던 키세의 목소리가 끊어지고 노래가 흘러나왔다. 아, 팝송.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콩나물을 냄비에 집어 넣었다.

 

 보글보글 끓는 소리를 들으며 카가미는 뒤를 힐끔 바라보았다. 신음소리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좀 줘? 무슨 소리야. 미심쩍은 표정으로 가스불을 끈 뒤 안방으로 걸어갔다. 엎드린 상태로 상체만 일으킨 아오미네가 보였다. 어, 깼나. …표정이 좋지 않은걸. 찜찜한 기분에 계속 바라보고 있으니 아오미네가 뭔가를 꾹 참는 듯한 표정으로 볼을 부풀렸다. 아. 정신이 번쩍 들었을 때는 그대로 우웩. 아, 신이시여.

 

"Oh, my god."

 

 카가미는 짧은 탄식을 내뱉으며 다시 뻗어버린 아오미네를 바라보았다. 저, 웬수 덩어리. 해탈한 기분이 이런 건가. 걸레를 들고 와 닦았다.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걸까. 바닥을 닦은 뒤 술 취한 주정뱅이를 응시했다. …다행아다. 침대에는 안 묻었네. 빨랫통에 쌓인 빨래들이 생각났다. 그건 또 언제 빨고 널고 한다냐. …우선 이 놈부터 어떻게 할까. 걸레를 대충 화장실에 던져 놓은 뒤 수건을 한 장 들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들고 온 수건으로 아오미네의 입가를 닦았다. 이 놈이 난 대체 뭐가 좋아서 같이 살자고 한 걸까. 한숨을 내쉬었다. …아, 눈 마주쳤다.

 

"으어, 으어아, 으어어……."

 

"외계생명체냐."

 

"시꺼어어, 머리 울려……. 허리도 아파……."

 

 카가미는 그 순간 입을 다물었다. ……죄송합니다. 자제력이 떨어져서 미안하다. 뒷목을 긁적이며 다른 한 손으로 아오미네를 굴려 제대로 눕혔다. 이불을 덮어준 뒤 침대에 걸터 앉았다.

 

"야……."

 

"왜."

 

"너 취향 독특한 거 아냐."

 

 카가미는 고개를 돌려 아오미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또 어딜 가서 뭘 들었길래.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푸른색 천장이다. 푸른색……. 그러게 말야. 덩치가 큼지막한 녀석이 뭐가 좋다고. 입가를 매만졌다. …나 그렇게 취향 독특했었나. 딱히. 타츠야가 남자를 사귄다는 것에도 별 거부감 없었으니 동성애에 대한 건 관대한 편이었고. …내가 이렇게 될 지는 몰랐지만.

 

"뭐, 어때. 좋아하는 데 이유 있나."

 

"…뭔가 짜증나는데, 너."

 

 …이건 싸우자는 건가.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니 아오미네가 몸을 뒹굴 굴려 벽을 응시했다. 아, 귀가 묘하게 빨갛다.

 

"I love you."

 

 놀려주자는 심보 반, 진심 반으로 말했다.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등에 무언가 부딪혔다. 얼굴? 고개를 돌리려고 하니 돌리지 말라는 조그만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진짜.

 

"…Me, too."

 

 푸핫, 웃음이 터져 버렸다. 정말 미워할 수 없잖아. 은근 귀여운 구석이 있다니까. 뭐, 나름 괜찮잖아. 너하고 나, 이렇게 둘이라는 거.

 

아오키세 

 

[쿠로바스/청황]꽃샘추위, 다시 너와 함께

written by. 티토

 

 아, 춥다. 아오미네는 손을 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으며 건물 밖으로 나왔다. 저녁 7시밖에 되지 않았지만 하늘은 어느새 어두워져 있었다. 평소보다 이른 퇴근이긴 하나 연구가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태라 모두 간만의 휴식을 즐기려는 듯 하나둘씩 빠져나가 주차장 안에 있는 것은 아오미네의 차뿐이었다. 아, 젠장. 나도 그냥 빨리 나오는 건데. 이것저것 조사한다고 앉아 있었더니 온몸이 찌뿌둥했다. 아오미네는 뭉친 어깨근육을 손으로 풀며 자신의 차로 걸어갔다. 시동을 걸고 연구소를 나서려다 문득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푸른빛을 띤 3층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오미네는 쓰게 웃으며 핸들을 검지로 톡톡 건드렸다. …오늘도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아오미네의 차는 연구소 정문을 부드럽게 통과했다. 아오미네는 목에 걸린 ID카드를 벗었다. 그리고서는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는 자신의 사진 아래에 적힌 문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오미네 다이키, 유전자 공학 연구소. 신호가 바뀌자 ID카드를 대충 외투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액셀을 밟았다.

 

 솔직히 자신이 이 연구소에 들어오게 될 거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대학 졸업 후 이제 어떡해야 고민하고 있던 때에 연구소장인 아카시로부터 제의가 들어왔다. 아카시 세이쥬로, 동기에게 들은 적이 있는 사내였다. 완벽주의자에 줄곧 수석만 해오던 냉혈한이라고. 정말 그럴까 했지만 처음 면 대 면을 했을 때 그건 루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농담도 할 줄 알고 웃을 줄도 아는 인간적인 사내였을 뿐이다. …완벽주의자는 사실인 것 같다만. 다만 아카시의 소개로 알게 된 부소장 미도리마는 들은 대로였다. 괴짜에 오하아사 신자에. 과연 어울릴까 하는 두 사람이 가장 친구 사이라니 아오미네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오미네가 보기에 둘 사이의 유일한 공통점이라고는 완벽함을 추구한다, 정도였다.

 

 눈 앞에 주택가가 나오자 아오미네는 속도를 줄였다. 빨간 지붕이 덮인 2층 집 차고에 차를 세운 뒤, 차에서 내렸다. 어디 보자. 외투 주머니를 뒤적여 손에 잡힌 것을 꺼냈다. …ID카드는 아니고. 껌도 아니고. …열쇠 어디 갔지? 미간을 찌푸린 채 오늘 자신이 집 열쇠를 어디 두었나, 곰곰이 되짚어 보던 아오미네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바지 주머니에서 집 열쇠를 꺼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싸늘한 공기가 아오미네를 맞이했다. 손을 뻗어 거실 불을 켜자 어젯밤 어질러 놓았던 꼴이 그대로인 것이 보였다. 저걸 또 언제 치워. 굴러다니는 맥주 캔들을 대충 발로 밀어둔 뒤 쇼파에 앉았다. 몰려오는 수마에 아오미네는 눈언저리에 손을 얹었다. 벌써 잠들면 안 된다.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띵동, 초인종 소리에 게슴츠레 눈을 떴다. 벽에 걸린 시계는 7시 5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3분 뒤면 8시. 이 시간에 올만한 사람이 있나 나열해보았지만 딱히 없었다. 그야 자신은 원래 이 시간이면 연구실에 있을 테니까. 귀찮음을 무릅쓰고 일어나 현관문을 열자 아오미네는 그곳에 분홍머리의 여성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츠키.”

 

 반쯤 잠긴 목소리로 여성의 이름을 부르자 사츠키라고 불린 여성은 아오미네 뒤에 펼쳐진 관경에 인상을 찌푸렸다.

 

“모모이, 라고 부르라니까. 정말, 아오미네 군, 평소에 이렇게 사는 거야?!”

 

 예전에는 이름을 불려도 별말하지 않더니만, 성인이 되고 남자친구가 생긴 뒤로부턴 성을 부르라고 난리다. 아오미네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며 벽에 기대어 섰다. 거실을 휙 둘러보던 모모이는 스웨터 소매를 걷었다. 아무래도 더러운 꼴은 못 보겠나 보다. 텅 빈 맥주 캔을 한 손에 두 개씩 집더니 부엌으로 걸어간 모모이는 기가 차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설거지할 게 산더미잖아!”

 

“아.”

 

“아, 가 아니라구. 분명 설거지하기 귀찮으니까 접시 여러 장 사다놓은 거지?”

 

 맥주 캔을 한 곳에 모아두고 거실로 돌아가 분주히 물건들을 치우던 모모이는 멀뚱히 서 있는 아오미네를 보고서는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아오미네 군이 하면 더 어질러질 것 같으니까 다른 곳에 가 있어.”

 

 그렇게 아오미네는 자기 집 거실에서 쫓겨났다. 침실로 들어온 아오미네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바닥에는 옷가지들이 널려 있었다. …아, 이거 보면 또 뭐라 할 텐데. 황급히 옷가지들을 모아 침대 밑으로 밀어 넣었다. 거실에서 모모이가 왔다갔다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모모이가 자신의 집에 들려 청소해주는 일도 자그만치 5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전에는……. 아오미네는 쓰게 웃었다. 아직 죽지 않았는데 이렇게 사색에 잠기다니. 분명 다시 그 일상이 돌아올 텐데.

 

 아오미네는 몸을 일으켜 침실 안쪽의 문을 열었다. 웅웅, 기계 소리가 들려 왔다. 어두운 방 안에서는 무언가 둥근 물체가 어렴풋이 빛을 내고 있었다. 흰색의 크고 둥그런 물체, 그것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선들, 안을 볼 수 있도록 만든 동그란 모양의 유리창이 있는 문. 아오미네는 그것들이 뭔지 알고 있었다. 저 등근 물체 안에는 양수가 들어 있다. 그렇지만 안에 들어있는 건 태아가 아니다.

 

 발을 움직여 문 앞에 섰다. 문에 나 있는 유리창을 통해 긴 속눈썹을 가진 남자가 보였다. 태양 같은 금빛 머리카락은 물에 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손을 뻗어 유리창에 살짝 얹었다. 아오미네는 무언가 울컥 올라오는 기분에 이를 악 물었다. 그러나 이내 힘없이 웃으며 손을 내렸다.

 

“다녀왔어, 키세.”

 

 5년 동안 잠들어 있는 연인이여.

 

 아오미네는 눈을 질끈 감았다. 금방이라도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볼 것만 같은 그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었다. 어째서일까. 분명 내상도, 외상도 다 치료가 되었을 것이다. 심장도 제대로 뛰고 있다. 살아있는데 어째서 눈을 뜨지 않는 걸까. 어째서 내게 웃어주지 않는 걸까.

 

 첫 만남은 참으로도 기묘했다. 자신과는 인연이 없을 것 같던, 학교의 왕자님. 키세는 그런 사람이었다. 학교 내에서 어딜 가나 주목받는, 여자아이들의 우상. 그렇다고 해도 남자들과 서먹한 관계는 아니었다. 누구나 그의 웃음을 보면 덩달아 웃게 되는 사람이었다. 저렇게 많은 사람들의 중심에 있으니 언제나 행복하겠구나, 라고 생각해서일까 옥상에서 마주친 그의 모습에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항상 웃고 있을 것 같던 그가 학교 옥상에 숨어 숨죽여 울고 있었다.

평소라면 조용히 자리를 떴을 자신인데, 그 날 왜 그렇게 할 수 없었는지. 하기야 그 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평생 너와 이야기 나눌 일은 없었겠지만.

 

 아오미네는 감았던 눈을 떴다. 어슴푸레한 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변함없이 키세는 잠들어 있었다. 그 때처럼 울지도, 웃지도 않은 채로 그렇게 쭉.

 

“오늘은 기분이 어때? 나, 오랜만에 일찍 왔는데.”

 

 아오미네는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거, 기억 나냐? 그 왜, 고등학교 2학년 겨울에, 방학하기 전인데 네가 바다 가고 싶다 해서 몰래 학교 빠져 나오다가 학주한테 걸린 거. 결국엔 반성문 쓴다고 그날 바다 못 갔잖아.”

 

 학교 후문 쪽 담을 네가 먼저 넘고 내가 넘었는데 그 앞에는 학생주임선생님이 서 계셨지. 너는 굳어 있고 말야. 아오미네는 뒷말을 삼켰다. 자신이 말하지 않아도 그 또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둘이서 바다가 너무 가고 싶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로 A4용지 한 장을 채워서 냈다가 혼났던 것도. 다시 반성문을 쓰면서 뭐라 쓸 지 끙끙댔던 것도.

 

“아, 그것도 있다. 너랑 같은 반 안 시켜주면 학교 안에 있는 풀들 다 뽑아버릴 거라고 교무실에서 난동 부렸는데.”

 

 너는 창피하다며 옷자락을 잡아 당겼었지. 뭐, 결국엔 같은 반이 되었다만. 또 뭐가 있더라. 아오미네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 이내 씨익 웃으며 키세를 바라보았다.

 

“고등학교 1학년 축제날에 너 여장한 거, 사진 아직도 있다. 지운지 알았지?”

 

 소리 내어 웃었다. 웃음소리는 이내 잦아들었다. 등 뒤로 모모이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오미네는 입술을 힘겹게 움직였다.

 

“내일 보자, 키세.”

 

 웃는 얼굴로 나를 보는 너를 볼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아오미네는 발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왔다. 문을 닫고 고개를 들자 모모이가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하던 그녀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잠시 동안 아오미네를 말없이 응시하던 모모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밥 차려 뒀어, 였다.

 

“밥 좀 제대로 챙겨 먹어.”

 

 밥을 입에 구겨 넣는 아오미네를 보며 모모이가 핀잔을 건넸다. 우물우물 열심히 씹던 아오미네는 물을 벌컥벌컥 마신 다음 입을 삐죽였다.

 

“제대로 챙겨 먹고 있어.”

 

“거짓말. 냉장고에 맥주밖에 없던데? 내가 반찬 안 들고 왔음 어쩔 뻔 했어?”

 

“아, 이거. …사 온 거지?”

 

“아니거든! 내가 제대로 만들어 온 거란 말야!”

 

 아오미네는 입을 쩍 벌린 채로 모모이를 바라보았다. 누가 만들어? 내 눈 앞에 있는 사람?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모모이는 입을 쭉 내밀며 말했다.

 

“…테츠 군이랑 같이 만들었어.”

 

“그러면 그렇지.”

 

 고생이 많았겠는걸, 테츠. 분명 이거 테츠 녀석이 다 만든 거겠지. 아오미네는 다시 젓가락을 움직였다. 물끄러미 아오미네를 바라보던 모모이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아까 말야.”

 

“아까?”

 

“역시 아오미네 군, 그거 여전히 하고 있는 거지?”

 

 아오미네의 젓가락질이 멈췄다.

 

“그렇지? ……키세 군.”

 

“……어.”

 

“…응, 그래.”

 

 모모이는 테이블 밑으로 손을 꼼지락거리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오미네는 묵묵히 입안 가득히 반찬을 넣었다. 잠시 적막감이 맴돌다 모모이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어때, 맛있지?”

 

“그래봤자 테츠가 다 했을 텐데.”

 

“……나도 했다니까?!”

 

“아아. 너 언제 가?”

 

“아오미네 군, 다 먹으면.”

 

“다 먹었어.”

 

“설거지하고.”

 

“…….”

 

 설거지를 마친 모모이가 나가자 순식간에 집 안이 조용해졌다. 아오미네는 노트북을 들고 와 거실 테이블에 놓았다. 특유의 음과 함께 화면이 켜지자 마우스를 움직여 폴더 하나를 눌렀다. 방대한 양의 파일이 화면에 가득 찼다. 아오미네는 눈을 감고 검지로 테이블을 톡 톡 쳤다.

 

 이 안에 들어 있는 파일들의 내용은 몇 번이나 읽어 외울 정도였다. 몇 년간 식물인간으로 살던 사람이 깨어났다 라든가, 양수를 이용한 치료기기를 통한 치료가 얼마나 걸렸냐는 것 등에 자료들이었다. 모두 다 키세처럼 사고를 당해 죽음 문턱까지 간 사람들이었다. 현재 의학으로는 어머니 자궁 같은 환경을 만들고 사람을 그 안에 넣어 치료하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심리적으로 가장 편안한 환경을 조성해 회복을 빠르게 만든다. 그렇지만 이 방법으로 일상생활에 복귀한 사람도 3년이 최대였다. 그 이상 넘어가면 기다리는 사람도 지치기도 하거니와 심장이 갑자기 멈추거나 뇌사 상태에 이르는 등 치료를 포기해야하는 상황이 다가오기 때문이었다.

 

 키세가 사고를 당한 후로 5년이 지났다. 하지만 키세의 경우는 조금 독특하다. 심장도 규칙적으로 뛰고 있고, 뇌도 정상적으로 기능한다. 마치 잠을 자고 있는 것과 같다. 더군다나 보호자와 관리자가 동일하다. 이 기계를 집에 설치할 경우 의료담당자가 붙게 되는데 그것을 아오미네 자신이 맡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오미네는 언제까지나 그를 기다릴 수 있었다.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뭐가 문제인 걸까. 안의 양수도 규칙적으로 갈아주고, 기계 조작도 제대로 해뒀는데. 혹시 양수와 비슷한 성질의 액체를 만들 때, 들어간 성분이 잘못된 걸까. 아오미네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매일 확인했지만 변질된 것도, 잘못 넣은 것도 없었다. 대체 왜, 그는 깨어나지 않는 걸까. 무슨 꿈을 꾸고 있기에 계속 잠만 자는 걸까. 머리를 쥐어뜯었다. 머릿속이 불안함으로 가득 찼다. 마지막 가정은……, 그가 살고 싶은 욕망이 없다, 라는 것. 주먹을 꽉 쥐어 테이블을 내려쳤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어. …하지만 진짜라면?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괜한 조바심 내지 말자. 피로가 한 번에 몰려와서 그래. 샤워하고 자면 머리가 말끔해지겠지. 아오미네는 노트북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비틀 욕실으로 향했다.

 

 샤워를 마치고 머리까지 말린 아오미네는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잠이 안 와. 몸을 뒤척이자 텅 빈 옆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눈을 질끈 감았다. 5년이 지나도 혼자 자는 건 익숙해지지 않았다. 품 안에 들어오는 따스한 몸의 온기가 없다는 것이 이렇게 외로운 것이라는 걸 널 만나기 전까지는 몰랐는데.

*

 꿈을 꿨다. 세계가 무너지고 있었다. 건물, 도로, 나무, 뭐 하나 성한 게 없었다. 하늘은 녹아내리듯 검게 물들었다. 피해야 해.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키세, 키세, 키세! 목 놓아 너의 이름을 불렀다.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저 여깄슴다, 아오미넷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요란한 소음 사이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굴을 환하게 밝히며 목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아,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망가자, 키세. 찾다보면 몸을 피할 곳도 있을 거야. 내 말에 너는 생긋 웃었다. 키세? 의아함에 네 이름을 다시 부르자 너는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전, 아무데도, 가지, 않슴다. 띄엄띄엄 말을 잇던 너는 입을 다물었다. 어째서? 왜? 대답 좀 해 봐, 키세! 그 때 네 머리 위로 건물 잔해가 떨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뛰어가려 했지만 거리는 멀었다. 젠장, 키세, 피해! 다급하게 외쳤다. 너는 그저 웃을 뿐, 아무런 대답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대로―.

 

 꿈에서 깨어났을 때는 온 몸이 식은땀으로 흥건한 상태였다. 아, 아, 아. 벌린 입 사이에서 탁 막힌 것 같은 신음소리만 흘러나왔다. 이건 분명 개꿈이다, 개꿈인데……. 답답함에 가슴을 쳤다. 몇 번 두드리고 나서야 막혔던 것이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오미네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키세…….”

 

 고개를 살짝 들어 키세가 잠들어 있는 방으로 통하는 문을 바라보았다.

 

“키세, 너 거기 있는 거 맞지?”

 

 목구멍을 비집고 간신히 나온 말은 몹시도 떨리고 있었다. 침대에서 내려와 문 앞으로 걸어갔다. 조심스레 손잡이를 돌렸다. 열린 문 틈 사이로 발을 내딛었다. 기계는 웅, 웅, 소리를 내며 정상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심박 수 정상. 현재 깊은 수면 상태에 빠져 있음. 아까와 같은 상태였다. 아오미네는 키세가 잠들어있는 탱크에 기대어 앉았다.

 

“제발 좀 깨어나 줘.”

 

 내가 너에게 뭘 잘못한 거냐. 아오미네는 낮게 울부짖었다. 좀 전의 악몽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어째서 너는…….

다리를 끌어당겨 얼굴을 파묻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쉽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

 

 정말 미쳤다고 생각했다. 밤을 지새우다 겨우 잠이 들었다. 그래, 이건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지. 잠든 장소가 난방을 돌리지 않는 방이라는 게 문제지. 목에서 컬컬한 기운을 느끼며 아오미네는 흰 셔츠를 꺼내 입었다. …어, 단추가 안 맞는데. 거울을 보니 하나씩 밀려서 잠겨 있었다. 미치겠네. 단추를 하나씩 끌렀다. 마음은 급하고 몸은 따라주질 않고, 간밤에 또 꿈을 꾼 것 같은데 기억은 안 나고. 단추를 다시 채운 아오미네는 바지를 갈아입었다.

 

“아침 먹을 시간도 없잖아…….”

 

 두꺼운 외투를 위에 걸친 후 현관문을 나섰다. …집 잘 보고 있어라.

 

*

 

 어떻게 온지도 기억이 안 난다. 아오미네는 ID카드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책상에 엎드렸다. 아직 하루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이렇게 녹초가 될 줄이야.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사용하고 있던 쿠로코가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아오미네를 바라보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어, 어.”

 

“…어제 모모이 상께 들었습니다만.”

 

 갑자기 말 꺼내는 거냐. 아오미네는 상체를 엎드린 채로 고개를 돌려 쿠로코를 응시했다. 흘깃 그 모습을 보는가 싶더니 쿠로코는 시선을 노트북 화면에 고정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직도 그 치료를 계속하시는 겁니까?”

 

“걔는 애인이라고 또 너한테 다 일러 바쳤냐.”

 

“질문에 대한 대답이 제대로 되지 않았는데요.”

 

 아오미네는 쿠로코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담담한 눈빛. 사츠키는 도대체 얘 어디가 좋다는 건지.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그래, 됐냐.”

 

“네.”

 

 만족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쿠로코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노트북을 끄고 차트와 볼펜을 챙긴 쿠로코는 그럼 이만, 이라고 말하며 의자를 밀어 넣었다. 개인 연구인가. 아오미네는 연필통에 담긴 펜을 잡았다. 습관처럼 볼펜을 돌렸다. 팽그르르, 검지손가락 위에서 돌아가던 볼펜이 툭, 떨어졌다.

 

“어라―, 미네칭이다.”

 

 느릿느릿한 어조로 말한 보라색 머리 남자는 과자를 품에 한가득 안고 있었다.

 

“무라사키바라, 너 그렇게 과자 많이 먹으면 아카시한테 혼날걸.”

 

“으응, 괜찮아. 어차피 여기서만 먹을 거구, 아카칭은 지금 개인연구 중이구.”

 

“미도리마는.”

 

 아오미네가 말을 끝냄과 동시에 문이 드르륵 열리며 미도리마가 들어왔다. 무라사키바라를 발견한 미도리마는 안경을 한 번 치켜 올리더니 매서운 눈빛으로 무라사키바라를 응시했다.

 

“무라사키바라.”

 

“우응―.”

 

 뚱한 표정을 지으며 무라사키바라가 과자 한 봉지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나선 손 씻고 올게, 라며 자리를 떴다. 아카시가 황급히 나가는 무라사키바라를 힐끔 보며 안으로 들어왔다. 자기 자리를 찾아가 위에 놓인 종이를 확인하던 아카시는 아오미네를 바라보았다.

 

“다이키, 오늘 안색이 안 좋은데.”

 

“아, 아아.”

 

 매의 눈이다. 아오미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감기 걸린 것 같아.”

 

“…아오미네 군도 감기에 걸리는 겁니까?”

 

“…걸리면 안 되냐.”

 

 어느새 돌아온 쿠로코의 입에서 나온 말에 아오미네는 입을 삐죽이며 대답했다. 쿠로코는 차트를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조금 의외라서요. 아오미네 군은 감기에 안 걸리실 줄 알았는데.”

 

“걸려서 미안하네.”

 

 노트북을 탁탁 두드리던 아오미네는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아카시가 여전히 자신을 보고 있었다.

 

“뭔가 할 말이라도?”

 

“아아, 그렇네. 다이키.”

 

 아카시의 표정이 한층 더 진지해졌다. 덩달아 얼굴을 굳히며 응시하자 아카시는 책상 위에 놓인 종이를 매만졌다.

 

“어제 늦게 퇴근하던데.”

 

 엄연히 따지자면 평소보다 일찍 퇴근한 편이지만 현재로써 딱히 연구에 몰두하고 있지 않은 자신이었기에 아오미네는 입을 다물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옆에 앉아있던 쿠로코가 흘깃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냥, 뭐……. 슬슬 개인 연구도 다시 시작해야겠고.”

 

“그게 아니라 찾고 있던 거 아냐? …살릴 수 있는 방법을.”

 

 머리를 긁적이고 있던 아오미네는 그 즉시 행동을 멈췄다. 입이 바싹 타들어갔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개인적인 견해야. 가망이 없어.”

 

 그 말을 끝냄과 동시에 아카시의 폰이 울렸다. 인상을 쓰고 액정을 응시한 아카시는 귀에 폰을 가져가며 방을 나갔다. 잠자코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미도리마가 패닉에 빠진 아오미네에게 말했다.

 

“솔직히 그 점에 있어서는 나도 동감이라는 거다.”

 

 안경을 고쳐 쓴 후 미도리마가 말을 이었다.

 

“이건 의지의 문제다. 본인이 살고 싶어 했다면 진즉에 깨어났을 거라는 거다.”

 

“…그 녀석이, 죽고 싶어 할 이유는 없어.”

 

 아오미네는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미도리마는 하얗게 질린 아오미네의 얼굴을 보다가 시선을 돌려 자신의 노트북 화면으로 향했다. 잠깐 동안 무라사키바라가 과자를 먹는 소리만 들렸다. 탁, 탁, 뭔가를 치는가 싶더니 미도리마가 다시 아오미네를 응시했다.

 

“그건 모를 일이지.”

 

 노트북을 닫은 미도리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몇걸음 옮기던 그는 잠시 멈춰 서서 말했다.

 

“아오미네, 네가 키세는 아니란 거다.”

 

 그러니 네가 키세의 속을 다 알 수 있을 리가. 단호하게 말을 내뱉은 미도리마는 이내 발을 움직여 밖으로 나갔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과자를 와삭 베어 물던 무라사키바라가 쿠로코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일인 거야? 쿠로코는 머릿속에서 단어를 골랐다. 옆에 아오미네가 있으니만큼 쉽게 대답할 수 없었던 쿠로코는 잠시 주저하다가 무라사키바라의 의문에 대답했다.

 

“키세 군에 관한 일입니다.”

 

“키세? 아―, 키세칭? …에에, 뭐야. 미네칭, 아직도 그거 하고 있던 거야? 이쯤되면 포기하는 게 좋아.”

 

“신경 꺼.”

 

 아오미네는 날카롭게 대답했다. 뭐야, 죄다 반응들이. 아직도, 라니. 분명 이 치료법을 시작한 초기에는 다들 이런 저런 조언을 해주며 키세가 하루 빨리 이 연구소에 돌아오기를 바랐었는데. 왜 다들 아직도 하는 거냐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런 기분 나쁜 꿈을 꾼 것만도 못해서 이젠 모두 포기하라고 하는 거냐고.

 

“으응, 뭐 내가 뭐라 할 처지는 아니지만.”

 

 어깨를 으쓱하며 개인연구를 하러간다는 말을 남기고 무라사키바라 또한 밖으로 나갔다. 문자를 확인한 쿠로코는 노트북을 접어 옆구리 사이에 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들 아오미네 군을 생각해서 하는 말입니다. 저 또한, 그렇게 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아, 그리고 아카시 군이 오늘 일찍 가셔서 쉬라고 전해주라 하시더군요.”

 

 말을 마친 쿠로코는 등을 돌려 나갔다. 젠장,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아오미네는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키세, 키세, 키세. 쉴 새 없이 키세를 불렀다. 네가 미치도록 보고 싶어.

 

 열이 오르는 느낌이었다. 아오미네는 결국 노트북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외투를 챙겨 입고 밖으로 나섰다. 찬바람이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외투를 단단히 여미며 차에 올라탔다. 핸들을 잡았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눈을 감고 숨을 고른 아오미네는 시동을 걸었다.

 

*

 

 집에 어떻게 왔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외투를 대충 집어 던진 아오미네는 침대에 엎어졌다. 젠장, 미치겠다. 욕설이 입 안에 맴돌았다. 나는 왜 이러고 있는 걸까. 대체 어떤 믿음으로 널 기다리고 있는 걸까. 네가 정말 내 곁에 돌아 올 수 있는 걸까.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문을 열었다. 여전히 웅웅거리며 있는 기계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안에 있는 너 또한.

 

“키세.”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키세.”

 

 계속해서 이름을 불렀다. 제발 이제 돌아와 주면 안 되냐. 내가 그렇게 많은걸 바라고 있는 건 아니잖아. 그냥 네가 살아 돌아오길 바라는 것뿐인데. 그게 그렇게 내게 과분한 거냐. 아오미네는 아랫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자신도 뭐하고 있는 건지. 내가 이렇게 약해져서야 되겠냐고. 삑, 삑. 기계음이 들렸다. 어라, 뭐지. 아오미네는 화들짝 놀라 기계로부터 살짝 떨어진 컴퓨터를 응시했다. 코드가 뽑혀서 나는 소리는 아니다. 그렇다고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다. 그럼 뭐지? 멍하니 기계에 난 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키…세?”

 

 아오미네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아직 눈을 뜬 것은 아니었다. 그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분명하다. 키세는 약간 울 것 같은 미소를 입가에 걸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런 표정이 없는 얼굴로 잠에 빠져 있던 것과는 다르다. 아오미네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난, 틀리지 않았어.

 

*

 

 거리에 봄기운이 가득했다. 아아, 벌써 봄이 찾아 온 건가. 아오미네는 손을 창밖으로 뻗어 바람의 스침을 느꼈다. 꽃망울이 맺히고 싹이 트는 계절. 이제 키세도 깨어날지도 몰라.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너와의 첫 데이트도 이렇게 따뜻한 봄날이었는데. 근처 공원이었지만 그래도 행복했는데. 서로의 아이스크림을 뺏어먹는 것도 그렇게 재밌던 나날들이었는데. 그래, 다시 그런 날로 돌아갈 수 있어. 아아, 빨리 깨어나면 좋을 텐데.

 

 네가 돌아온다면 가장 먼저 뭐부터 할까. 아, 그래. 지난 5년간의 일들을 말해주자. 매일 너에게 말을 걸었지만 너는 잠들어 있었을 테니 못 들었을지도 몰라. 가장 먼저 그것부터 하자. 그리고 또 뭘 할까. 놀이동산? 아, 그건 좀 무리이려나. 음, 그것도 괜찮을 거 같아. 집에서 하루 종일 조용한 일상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너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니까. 그리고 네가 먹고 싶어 했던 것들을 먹고, 영화 DVD도 빌려와서 하루 종일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아, 그냥 너와 함께 있고 싶은걸.

 

 그 뒤에는 네 얘기를 들려줘. 어떤 꿈을 꿨고 꿈속에서 무얼 봤는지. 시시한 꿈이어도 좋아. 그냥 네 목소리가 듣고 싶어. 네 무릎에 누워 눈을 감고 네 목소리를 듣고 싶어. 그저 그것만이라도 좋아. 그러니까 제발.

봄이니까,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는 봄이니까.

*

 

 방 안이 엥 엥 소리로 가득 찼다. 어째서? 아오미네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응시했다. 분명 괜찮았다. 봄이었다. 그러니까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다. 따뜻한 봄내음과 함께 돌아와 예전처럼 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째서? 내가 많은 걸 바란 거냐. 단지 예전으로 돌아갔으면 했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 잘못했던 거냐고. 책상을 내리쳤다.

 

 수치가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잠잠하던, 잠을 자고 있던 그 때와는 달랐다. 이건 정말 위험해. 진짜 죽을 지도 몰라. 그렇다고 해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었더라. 다리에 힘이 풀렸다. 멍하니 그가 잠들어있을 기계를 바라보았다. 이게 네 진심이었냐, 키세.

 

 환기를 위해 열어둔 조그만 창문을 통해 싸한 바람이 들어왔다. 봄, 아니었나. 창문 앞에 섰다. 쌀쌀한 공기.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봄기운이 물씬 풍기던 것 같았는데.

 

 아오미네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기나긴 겨울은 아직 끝나지 않은 건가.

*

 거의 넋 나간 상태로 며칠을 보냈던 것 같다. 주변 사람들도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오미네는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시선에 담긴 연민, 동정. 이제 현실을 깨달은 거냐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직 키세는 기계 안에서 잠들어 있었다. 이제 정말 결단을 내려야할지도 모른다. 입안이 텁텁해졌다. 하고 있던 목도리를 풀었다. 어느 순간 다시 따뜻해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봄이니까 돌아올 거란 기대 따위는 하지 않았다. 이미 그 기대는 무너진 지 오래다. 헛된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아오미네는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 언제나처럼 웅 웅 거리는 기계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이 소리도 5년 만에 사라지겠지. 마지막으로 기계 앞에 섰다.

 

 안녕, 키세. 이제 보내 줄게.

 

 기계 가동을 중지하고 너를 꺼내서 바다에 뿌려줄게. 언제 네가 원했던 것처럼. 바다에 뿌려달라는 네 소원처럼.

 

 손을 기계 위에 얹었다.

 

“안녕.”

 

 눈을 질끈 감았다. 몇 발자국만 움직이면 기계를 관리하고 있는 컴퓨터 앞에 설 수 있다. 그리고 조작을 하면, 이제 정말 안녕.

살며시 눈을 떴다. 아. 입이 살짝 벌어졌다. 눈이 커졌다. 하얀 손이 자신의 손이 닿은 유리에 닿아 있었다. 힘겹게 입술을 움직였다. 실 같은 목소리가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키……세.”

 

 하얀 손의 주인은 생긋 웃었다. 창백한 입술이 움직였다.

보고 싶었어요, 아오미넷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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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바스/청금]세계의 시작

쿠로바스 | 2015. 3. 1. 12:20
Posted by 물빛녘

※아오이마

 

 

[쿠로바스/청금]세계의 시작

written by. 티토

 

 

 제발 누가 헛 것을 봤다고 해줬으면 좋겠다. 아오미네는 눈 앞의 관경에 경악했다. 수많은 책들이 꽂혀 있었다. 오, 젠장, 신이시여, 이제 착하게 살테니까, 제발 이 책들을 다 읽어야 한다고 말하지 말아주실래요? …안타깝게도 신은 자신의 편이 아니었나보다. 적어도 100권이 넘어 보이는 서적들을 자신은 읽어야 했다. 이런 미친.

 

 아오미네는 머리를 쥐어 뜯었다. 뭔 놈의 서적이 이렇게 많은 걸까. 더군다나 이 책들은 죄다 외국어로 적혀 있었다. 루스국 언어였나. 자신이 살고 있는 알펜국과는 최근 교류가 늘어난 국가였다. 사막으로 왕래가 힘들어 거의 국교가 단절되다시피 되어 있던 상태였는데 돈을 벌고 싶어 환장한 상인들이 어떻게든 해로를 개척했다던가. 개척했다고 해도 바다는 위험한 생물들이 가득이라 바다로 나갔다 하면 떠난 무리의 반은 죽음이라고 생각하면 됐다. 뭐 그걸 감수해서 얻는 이익이 상당하다긴 하더만은. 그 자식들이 이윤을 챙겨 먹든 간에 지금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다시 한 번 자신이 봐야할 책들이 꽂힌 칸을 올려다 보았다. …오, 미친.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도서관이라 소리지르지도 못하고. 숨을 가다듬으며 울컥 올라오려는 것들을 억누른 아오미네는 우선 손을 뻗어 그나마 얇아 보이는 책 5권을 꺼냈다. 얇다고 해도 300페이지는 기본이었지만. 몇 페이지를 넘겨보니 모르는 말들이 한가득이었다. …사전도 빌리자. 아오미네는 침통한 표정으로 걸어갔다. 

 

 자신 혼자서는 무리다. 사전이 있다고 해도 힘들다. 도움을 부탁할 사람이 어디 없을까. 아오미네는 머리를 굴려 자신의 좁은 인맥들 중 외국어에 능통한 사람을 찾았다. 테츠? 오, 나쁘지 않다. 무난한 정도일테니까. 더군다나 여기 사서이기도 하고. 이왕 온 김에 부탁해볼까.

 

"아오미네 군?"

 

"…으헉."

 

 눈 앞에 불쑥 나타난 쿠로코때문에 놀란 아오미네는 뒤로 몇발자국 물러섰다. 놀랐잖아, 테츠! 벌렁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아오미네가 말하자 쿠로코는 미안한 기색도 없이 죄송합니다, 라고 말했다. …정말 죄송한거냐고. 뭐 좋다. 만나러 갈 생각이었으니까.

 

"테츠, 잠깐 시간되냐?"

 

"그건가요. 뭐, 됩니다만. 따라 오세요."

 

 책등에 적힌 제목들을 훑어 본 쿠로코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녀석이라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

 

"너도 참 질기군요."

 

"…어이, 테츠. 그거 실례다."

 

"아, 죄송합니다."


 전혀 죄송하지 않은 것 같은데. 차를 홀짝 마시는 쿠로코를 보며 아오미네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뭐, 이 녀석이 이러는 게 한 두번도 아니고. 손을 움직여 들고 온 책 표지를 검지로 툭툭 건드렸다. 여기에 자신이 찾는 정보가 있을까. 다과를 오물거리던 쿠로코가 아오미네를 흘깃 보더니 입을 열었다.


"역시 그걸 찾고 있는 건가요? 사람을 살릴 수 있다던, 예의 '꽃' 말입니다."


"아아."


 아오미네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꽃이라고 해도 꽃은 아니다. 사실 어느 누구도 그것의 형태를 모른다. 실존하는 것인지 조차도 의심스럽다. 그렇지만 자신은 찾아야했다. 나를 위해서, 라는 이유는 아니었다. 그가 원하니까.


"이마요시 상이 찾던 것이었죠. 그러고보니 그는 일리야국 출신이었던가요."


 일리야국. 아오미네는 표정을 굳혔다. 지나칠 정도로 폐쇄적인 국가였다. 알펜국과는 사막을 사이에 두고 있어 왕래도 힘들 뿐더러 주변국인 루스국과도 도시 하나만을 개방해 교류할 뿐이다. 혹 운이 좋아 사막을 횡단해 일리야국 국경에 도착할지라도 게이트라는 것을 통과해야만 하는데 한 번 통과하면 돌아나올 수 없다고 했다. 그런 폐쇄적인 곳에서 그는 왔었다. 사막을 건너, 자신의 약혼녀와 함께.

 

"이상하지 않나요?"

 

"뭐가."

 

"분명 약혼녀 분을 살릴 목적으로 찾는 거라고 예전에 말씀하신 적 있었죠. 하지만 이곳에 그가 왔을 때 약혼녀 분은 살아계셨습니다. 그것도 십여년동안. 그럼 이상하지 않습니까?"

 

 쿠로코는 남은 차를 한 입에 털어넣더니 아오미네를 응시하며 말했다.

 

"적당한 서적을 골라드리겠습니다."

 

*

 

 아오미네는 쿠로코에게 책을 한아름 받았다. …사전도 있었다.

 

 이상하다라. 사실 그가 찾아야 한다기에 찾는 것일뿐 자신은 아무것도 몰랐다.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왜 이곳에 왔는지, 떠나지 않는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은 7살, 어린아이였다. 일찍 부모를 잃고 골목을 떠돌던 자신을 데려갔던 그는 20살 정도 되어 보였다. 지금 자신은 25살이었다. 그리고 그는… 전혀 늙지 않았다. 일리야국 사람들은 원래 수명이 길다더라, 라는 이야기가 사실인걸까.

 

 아오미네는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쇼파에 잠들어 있는 남자가 보였다. 안경은 테이블에 올려놓은 상태였다. 유심히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일리야국인이라. 이들은 참으로 이상했다. 방대한 지식을 갖고 있음은 물론이고, 늙지 않았고, 타국에 머무르는 시간이 오래될수록 일리야국에서의 기억과 관습 등 일리야국과 관련된 모든 것을 서서히 잊어갔다. 눈 앞의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자신이 왜 여기 왔는지, 어째서 그걸 찾고 있는지, 심지어 찾고 있는 사실조차도. 그에게는 알펜국에서의 기억 일편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아오미네는 책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바닥에 앉았다. 힐끔 뒤를 보니 깰 기미는 안 보였다. 좋아, 시작해볼까. 책을 하나 골라 펼쳐 놓은 사전 옆에 놓았다.

 

 이렇게까지 찾는 이유는 단순했다. 꽃을 찾으면 그의 예전 기억들도 돌아오지 않을까. 그러고보니 나오기 전 테츠가 그랬었지. 약혼녀를 살리는 게 목적이라면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아도 되지 않냐고. 하긴 알펜국에서 '꽃'이 뭔지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꽃의 존재를 모르는 이상 그가 자신을 의지하는 이 상황이 지속되는 것이 자신에게 좋지 않을까. 문득 생각이 그리 미쳤지만 아오미네는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그럴 수 없었다.

 

"물을 주는 기가?"

 

"…?!"

 

 화들짝 놀라 책을 덮으면서 뒤를 돌아보자 안경을 쓰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마요시가 있었다. 이마요시가 깼다는 것에 놀란 아오미네는 이마요시가 책 내용을 읽었다는 것에 놀랐다.

 

"너무 놀라지 말그라. 루스국어는 쪼만할 때 배운 적이 있데이. 기억을 잊는 거지 지식을 잊는 건 아니그라. 뭐 찾는지는 모르겄지만 내가 도와준다카면 싫다하긋재."

 

 히죽 웃으며 이마요시가 덧붙였다.

 

"내, 배고픈데 뭐 먹을 거 없나?"


*


 이마요시에게 밥을 차려둔 뒤 책을 끌어안고 밖으로 나왔다. 아, 젠장. 이제 어쩌지. 혹시 이거 읽을까 싶어 들고 나왔긴 하다만. 같이 찾으면 좋긴 하겠지만, 이마요시의 몸상태는 현재 좋지 못했다. 뭐랄까, 의사의 말에 따르면 일리야국인이 타국에 오랜기간 머무르는 것은 좋지 않은 것 같다나. 뭐야, 그게. 의사 맞아? 그렇지만 실제로 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랑 다를지도.


 정처없이 걷다보니 무구점 앞에 서 있었다. 가게를 정리 중인 카가미가 아오미네의 눈에 들어왔다. 시선이 마주쳤다.


"뭐야, 살 거 있어? 미안하지만 오늘은 그냥 문 닫는데?"


"야, 카가미."


"엉?"


"너 루스국 출신이지. 마침 잘 됐다."


 쿠로코에게서 카가미가 루스국 출신이라는 것을 들은 적이 있던 아오미네는 그것을 떠올리며 말했다. 최고의 조력자를 찾았다.


*


"꽃? 뭐야, 그걸 찾는 건가."


 카가미가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뭐냐, 그 반응은. 아오미네는 미간을 찌푸렸다. 카가미는 아오미네가 들고 온 책들을 훑어보더니 책 한 권을 들고 다른 책들을 옆으로 밀어뒀다.


"이거만 보면 될거야. 다 똑같은 말들 써 있을 거거든."


 "오, 좀 읽어줘."


 카가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를 넘겼다. …야?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만 들렸다.

 

"읽어달라고."

 

"아, 소리내서 말하는 건가. 미안."

 

 제일 첫 장으로 돌아간 카가미가 입을 열었다.

 

"NaNun Jollibda."

 

 …어이. 아오미네는 어이가 없어 표정을 굳혔다. 뭐하자는 거냐, 너.

 

"번역해달라고."

 

"아."

 

 …오늘 내로 3장은 읽을 수 있을까.

 

*

 

"…뭐 이정도야. 루스국에서 알고 있는 정보는 이게 끝."

 

"별로 없는 거 같은데."


"그야 그 꽃은 일리야국에서 핀다는 것 같으니까."


 아오미네는 그 말에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리야국에서? 그렇다면 말이 안 된다. 이마요시는 처음 자신을 만났을 때 꽃을 찾아 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여기 머무르는 내내 그 꽃을 찾아 헤맸다. 그가 거짓말을 했다? 도대체 왜? 무슨 이득이 있어서? 모든 것을 잊어버리면서까지 여기 있어야 할 이유가 있었던 걸까.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면 될텐데?


 패닉에 빠진 아오미네를 힐끗 본 카가미가 말을 이었다.


"내 생각에는 이딘에 가면 더 자세한 정보를 알 수 있을 거야. 아, 이딘은 일리야국에서 유일하게 타국인이 갈 수 있는 지역. …하지만 꽃은 분명 내지에 필걸. 아마도 수도에. …어떻게 할래?"

 

 어떻게? 그가 자신을 속였다는 거에 어떻게 반응할 거냐는 건가. 어떻게, 라.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것도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그를 믿어도 되는 걸까. 아오미네는 좀 전까지 카가미가 읽던 책 표지를 바라보았다. 사정이 있었을지도. 정답은 그곳에 있지 않을까.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곳에 가야겠어."

 

"…역시 그렇게 하는 건가. 좋아, 도와줄게. 우선 루스국으로 가서 이딘에 들어가. 지인한테 연락 넣어둘테니까. 일리야국은 폐쇄적이긴 해도 어떻게든 들어갈 방법은 있거든. 하지만 걸리면 목숨은 보장 못 해. 그래도 갈래?"

 

"…갈래. 이마요시 상이 왜 거짓말을 했는지, 그 꽃이 과연 뭔지, 궁금하거든."

 

 담담하게 대꾸했다. 출발은 일주일 뒤. 그 사람도 같이 가야해. 사막을 통해 루스국으로 가는 게 더 빠를 거야. 이것저것 말을 덧붙인 카가미는 아오미네의 얼굴을 보며 씩 웃었다.

 

"세계의 시작에서 세계의 기원을 보고 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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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바스/녹고]만약

쿠로바스 | 2015. 3. 1. 12:19
Posted by 물빛녘

※미도타카 

 

[쿠로바스/녹고]만약

written by. 티토



 비가 올 것 같은데. 타카오는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하늘은 푸른빛을 잃어버린 잿빛을 띄고 있었다. 구름도 잔뜩. 으음, 비 맞기 전에 얼른 집으로 가야겠는걸. 양손에 들린 비닐봉지를 흘깃 본 뒤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아, 제발 집에 들어가기 전까지 비가 내리지 않기를. 마음같아서는 달려가고 싶었지만 무거운 비닐봉지를 양손에 들고 뛸 체력이 없었다. 역시 고등학생 때가 절정기였던건가.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짓던 타카오는 히죽 웃었다. 절정기가 자시고 간에 올해도 함께입니다! 짐을 고쳐 들었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연인의 손을 빌릴까 생각도 해봤지만 일을 방해할 수는 없지. 암암, 그렇고 말고.


 그러고보면 첫만남은 정말 구렸는데. 타카오는 그 때가 생각나자 인상을 찌푸렸다. 된통 깨졌었지. 그랬던 녀석을 같은 고등학교에서 만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고. 냉정한 듯 보이지만 의외로 속이 따뜻했지. 아, 물론 지금도. 정말 신쨩은 츤데레인게 분명해. 그래도 그런 신쨩이 좋아. 미도리마를 머릿속에 그리며 히죽 웃던 타카오는 이내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좋다고 해도 남자와 남자 간인데, 그걸로 되는 걸까.


 이 사회는 사랑하니까 함께 해주세요, 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녹록하지만은 않다. 사회인이 된 이상 돈도 벌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야 한다. 이 사회의 군중들 사이에서 고립된다는 것은 자살 행위다. 싫든 좋든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며 그 사람들이 다 남자와 남자의 사랑을 축하해주리는 기대할 수 없다. 그리고 신쨩도 사실 가정을 꾸리고 토끼같은 자식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살고 싶진 않을까. 괜스레 드는 생각에 타카오는 머리를 내저었다. 함께 있으면 좋아. 신쨩도 그렇게 말했잖아? 그래, 그거면 된 거야.


 애써 자기위로를 하며 인도 위를 걷고 있을 때,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뭐지, 하며 사람들의 시선을 쫓으니 도로 위에는 피투성이가 된 여성이 있었다. 여성의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운전자 또한 시야에 들어왔다. 교통사고? 타카오는 멍하니 그 관경을 바라보았다. 여자는 멍하니 도로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이 흔들린다. 군중 무리 속에서 어떤 남자가 허겁지겁 현장을 향해 뛰어나갔다. 여자의 몸을 부둥켜 안으며 울부짖었다. 남자친구인가 봐. 쯧, 쯧, 어째? 안 됐네. 사람들이 수근거리는 소리가 멍하게 서 있는 타카오의 귀로 들어왔다. 정말?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그러면서도 폰을 꺼내드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누군가 불렀는지 구급차와 경찰차가 달려왔다. 여자가 구급차에 실리는 것과 마지막으로 남자가 따라 타는 것을 볼 때까지 타카오는 그 자리에서 꼼짝할 수 없었다.


*


 어떻게 집에 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현관문 앞에 서서 애써 평온을 가장하며 문을 열었다. 썰렁한 공기가 피부로 느껴졌다. 정말 신쨩 아침부터 내내 작업중이라고 해도 보일러는 돌리라고. 쓰게 웃으며 거실 불을 켰다. 머릿속에서는 좀 전의 상황이 재생되려 하고 있었다. 올라오려는 속을 진정시키며 부엌으로 걸어갔다. 비닐봉지 속 먹거리들을 꺼내 냉장고에 넣은 뒤 식탁을 짚었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정말 그렇게 한순간에……. 더는 생각하지 말자. 그 여자분도 무사할테고, 나도 괜찮은거야. 응, 그래, 그렇지. 그러니까 평소처럼 웃어야지.


  발을 옮겨 미도리마가 있을 작업실 문 앞에 선 타카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다고 했지만, 아직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신쨩은 의외로 이런데서는 눈치가 빠르다니까. 표정을 가다듬으며 문을 열자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미도리마가 눈에 들어왔다. 진지하게 몰두있는 모습에 타카오는 쭈볏쭈볏 구석에 놓인 매트릭스에 앉았다. 곡 작업에 몰두하는 미도리마의 뒷모습을 감상하기 위해 갖다 둔 매트릭스였다. 물론 여기서 잘 때도 있었지만.


 인기척을 느꼈는지 미도리마가 뒤를 힐끗 바라보았다. 타카오가 히죽 웃으며 앗, 들켰다, 라고 말하자 미도리마가 생각보다 늦었다는 것이다, 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에, 신쨩, 나 보고 싶었어?"


"당연하다는 거다."


 에. 그럴 리가, 라는 말이 나올 것을 예상하고 있던 타카오는 뜻밖의 발언에 얼굴을 붉혔다. 역, 역시 기적의 세대인가?! 직구에 능해! 타카오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미도리마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려 피아노 건반을 눌렀다. 한 손가락으로 건반을 두드리던 미도리마는 이내 왼손 또한 건반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연주를 시작했다.


 처음 들어보는 곡인데, 새로 작업 중인 곡이려나. 타카오는 눈을 감고 연주에 집중했다. 선율은 너무나도 따뜻해서 좀 전의 불안함이 씻겨져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잠시동안의 연주가 끝나고 미도리마가 악보를 손에 쥐었다. 샤프를 움직여 음표를 그려나가던 미도리마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었던 건가."


"응? 아, 아니. 딱히 없었어."


 매트릭스를 움켜 잡으며 대답했다. 우와, 놀래라. 히죽 웃었다. 입 주변 근육에 경련이 올 것 같다. 그래서 애써 웃지 않기로 했다. 연인이니까, 숨겨서 좋을 건 없지 않을까. 타카오는 작업에 집중하는 미도리마를 바라보았다. 신쨩, 아까부터 손이 안 움직이는걸.


"있잖아, 신쨩. 만약에 말야. 진짜 만약인데, 내가 먼저 죽으면 날 위해 곡 하나만 써줄래? 그리고 그 뒤에는 나 잊고 살아가 줘."


 타카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미도리마가 쳐다보는 지는 알 수 없었지만 괜스레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았다. 사람 일은 알 수 없고, 사랑한다 해도 결국은 축복받을 수 없다. 언젠가 헤어져야 한다면, 그게 내 죽음이라면 그렇게 해 줄래, 신쨩?


"…너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가, 타카오."

 

"혹시나, 라고 했잖아."

 

"그렇군. 그럼 나는 너에게 단편 소설 한 권을 부탁할까. …60페이지 정도."

 

 이건 또 무슨 소리? 타카오가 눈을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그게."

 

"그리고 나는 네가 죽게 되거든 이 방을 앨범으로 채울 때까진 잊을 생각이 없다는 거다."


 그 말에 타카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엄청 넓어. 아, 위험.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려고 해. 타카오는 자꾸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간신히 제 위치로 고정시키며 짐짓 삐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여느때보다도 진지한 표정으로 미도리마가 타카오를 응시했다.

 

"에, 그게 뭐야. 신쨩, 이 방 무지 넓다고? …그럼 난 장편소설 낼 거야. 이 방 꽉 채우고 거실까지 채울 정도로 긴 시리즈물로!"

 

 그 말에 미도리마가 피식 웃었다. 뭐가 그렇게 웃겨, 신쨩?! 난 신쨩처럼 말했을 뿐이라고! 타카오가 입을 삐죽이며 미도리마를 흘겨 보자 미도리마가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즈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내가 널 두고 먼저 죽을 일은 없다는 거다."



 

[쿠로바스/금립]과제

쿠로바스 | 2015. 3. 1. 12:16
Posted by 물빛녘

※이마카사 


[쿠로바스/금립]과제

written by. 티토

 

 이건 정말 예전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카사마츠는 샤프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애써 옆에 앉은 사내를 무시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이 남자와 같은 대학에 입학해서? 심지어 같은 학과여서? 우연히 같은 조가 되어서? 다른 조원들이 이런저런 사정을 대며 모임에 나오지 않아서? 젠장, 어찌되었든 이 상황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머리가 지끈거려 이마를 짚자 옆에 앉아 있던 사내가 물었다.

 

"머리 아프나? 내, 약이라도 갖다 주까?"

 

"됐어. 자료 정리는 끝났냐?"

 

 손을 내저으며 묻자 남자는 안경을 살짝 올린 뒤 종이 뭉치를 손에 들고 펄럭였다. 끝났다는 의미다. 니는. 남자가 카사마츠의 귀 가까이 얼굴을 가져가 나즈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뜨거운 입김이 귓 속을 간지럽혔다. 이건 일부로 그러는 거다. 카사마츠는 단언할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자신이 움찔거리는 걸 즐기고 있다고.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책상 위에 놓인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맡은 부분도 끝나 있었다.

 

"끝…났어."

 

 귓볼을 살짝 무는 그의 행동에 카사마츠는 몸을 파르르 떨었다. 아, 젠장. 이 자식은 정말 나를 가지고 놀 생각이다. 참으로 질긴 인연이었다. 고 3 인터하이에서 만났고, 일 년 뒤 대학에서 만났다. 그리고 때때로 같이 자는 사이가 되었다. 첫만남에서 이렇게 되리라는 걸 예상할 수나 있었을까. 카사마츠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 녀석은, 이마요시는 지금 장난을 치고 있을 뿐이다. 진짜로 자고 싶었다면 이렇게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의외로 이마요시라는 남자는 욕망에 충실했고, 그 감정에 대해서 말하기를 꺼려하지 않았다. 하고 싶었다면 하자고 말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자신의 반응을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 안달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싶을 뿐 끝까지 갈 생각은 없는 것이다.

 

 아, 빌어먹을. 카사마츠는 솔직히 이 상황이 짜증난다, 라고 생각이 들었다. 성인이 되어 갖는 첫 관계는 남자가 가져갔다. 그리고 그 관계는 지속되고 있다. 하기야 여자라면 무서워서 벌벌 떠는 자신에게 무슨 여자친구겠냐만은. 뭐 그건 그렇다 쳐도 이런 상황은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할려면 하던가, 깨작깨작 이게 뭐냐고.

 

 이제는 귓볼에서 내려와 목덜미를 핥고 있었다. 축축한 감촉이 목덜미에서 느껴지자 카사마츠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약았다. 자신이 느낄 거라는 걸 알고 하는 행동이었다. 정말 이 남자는……. 이마요시의 손이 카사마츠의 허리춤을 더듬었다. 이젠 목덜미를 깨물고 허리를 만지고. 머릿속이 온통 하얗게 변했다. 발가락이 오므라들었다. 하얘질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만 좀 하라고. 이렇게 말해야 했건만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소리는 교태 어린 신음소리였다. 아, 미치겠네. 이게 남자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소리였던가. 이게 다 이 녀석때문이다. 간신히 눈을 떠 이마요시를 노려보았다. 이 녀석때문에 자신이 이상하게 되었다.

 

 한참을 쇄골을 잘근잘근 깨물던 이마요시가 고개를 들었다. 장난은 끝이라는 뜻이다. 누구 맘대로. 카사마츠는 이마요시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입술을 맞춘 뒤 살짝 떼며 말했다.

 

"할 거면 끝까지 해."

 

 

[쿠로바스/청적]마피아AU

쿠로바스 | 2015. 3. 1. 12:09
Posted by 물빛녘

[쿠로바스/청적]마피아AU

written by. 티토 


이건 실전이다. 아오미네는 숨을 고르며 쥐고 있던 총의 총구를 만지작거렸다. 이곳에서 총알이 발사되고 목표물을 맞춘다. 그것 하나는 연습 때와 같았다. 다른 점이라면 목표물은 사람을 그려놓은 종이 따위가 아니라 진짜 사람이다. 아오미네는 몇번이고 그 사실을 되새겼다.

 

첫 임무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여태까지 투입되었던 임무 중에서 중요도를 매기자면 최상위였다. 실패하면 자신도, 그리고 그마저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다. 손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성공해야 한다. 그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설령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서라도. 그가 이걸 원한다면 어떻게든 자신은 성공시켜야 한다. 총을 고쳐 잡은 아오미네는 한쪽 입꼬리를 올려 비뚜름한 웃음을 지었다. 설마 자신이 실패할 리가. 성공률은 백퍼센트다. 성공을 확신할 수 있는 건 자신, 그리고 그를 향한 굳은 믿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벽에 기대어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후 아오미네는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어두운 실내를 걷다보니 쓰러진 시체를 발로 툭 툭 치게 되었지만 넘어지는 일은 없었다. 자, 어디 숨으셨나. 낮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목표물이 있음직한 곳은 다 찾아봤지만 머리카락 한 올도 찾을 수 없었다. 사전에 피한 걸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도 아니다. 이번 일은 그와 자신, 자신이 믿을 수 있는 부하 몇 명들과 계획한 것이다. 그게 그렇게 쉽게 흘러나갔을 리가 없다. 아오미네는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머리를 헤집었다.

 

고요한 복도를 진동음이 채웠다. 아오미네는 손을 움직여 주머니 속을 뒤졌다. 스마트폰이 넘쳐나는 지금, 구식이라고 볼 수 있는 폴더폰을 꺼낸 아오미네는 폰을 열어 귓가에 가져갔다. 특유의 사투리가 들려왔다. 아오미네의 최측근인 이마요시였다.

 

"왜."

 

-고 놈 찾았데이. 근데 와카마츠, 야가 놓쳤다. 아마 2층 오른쪽 복도로 가고 있을 긴데.

 

2층 오른쪽 복도?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여기일텐데. 자리에 멈춰서서 주변의 소리에 집중했다. 고요하다. …아니, 뭔가 달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씨익 웃으며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몸을 틀었다. 소리의 주인공은 계단을 걸어내려와 아오미네가 서 있는 복도에 발을 들이밀었다.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아오미네는 즉시 총을 그에게 겨눴다. 그리고 탕, 총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

 

조직 내가 소란스러웠다. 아오미네는 그러든가 말든가 자신의 집무실 쇼파에 누워 잠을 청했다. 얼굴 위에는 그라비아 잡지를 올려놓고서. 눈을 감으니 며칠 전 임무 상황이 떠올랐다. 총에 맞은 남자는 경악한 얼굴을 한 채 앞으로 고꾸라졌다. 죽었나, 확인하기 위해 느릿느릿 발을 움직여 남자 앞에 섰다. 숨을 쉬고 있는 듯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아오미네는 발로 남자를 뒤집었다. 이마 정중앙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는 중년남성의 얼굴을 확인하자 조소가 입가에 절로 담겼다. 죽음은 한순간이라지. 폰을 들어 이마요시에게 정리해, 라는 말을 건넨 뒤 폴더를 닫았다. 발을 돌려 나가려다 남자를 흘깃 쳐다봤다. 붉은 피가 멎을 생각을 하지 않고 흘러나오는 게 보였다. 붉다, 라. 자연스레 연상되는 남자의 얼굴에 저도 중증이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발걸음을 돌려 건물을 나서자 뒤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상황 종료, 임무 완수.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자신을 맞아준 그는 수고했다며 자신을 껴안아 주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지친 몸을 달래기에는 충분했다. 한참을 침대 위에서 나뒹굴던 아오미네에게 그가 내린 지령은 참으로도 간단했다. 며칠동안 휴식. 단번에 엎으면 될 일을. 아오미네가 입을 삐죽이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조바심 낼 것 없어, 다이키.

 

"차근차근인가……."

 

저돌적인 자신과는 다르게 신중한 그다웠다. 아오미네는 피식 웃었다. 휴식을 취하라고 했으니 명령에 따라야겠지.

 

눈을 감고 얼굴 위에 잡지를 올려놓은 채 잠을 청하고 있는 아오미네의 귓가로 문열리는 소리와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아오미네는 청각에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 조심스러우면서도 경쾌한 발걸음 소리였다. 그런 녀석이라면 짐작가는 녀석이 딱 하나 있었다.

 

"어이, 키세."

 

잡지가 위로 들림과 동시에 환한 빛이 얼굴 위로 쏟아지자 아오미네는 신경질적으로 범인의 이름을 불렀다. 간신히 눈을 떠 얼굴을 확인하니 역시 금발 머리 녀석이었다. 얼굴 하나는 반지르르한 녀석. 이 녀석이 이런 더러운 곳에 발을 내밀었다는 게 아직까지도 미스테리였다. 어찌되었든 잠을 방해한 이유는 물어보자는 심보로 쇼파에 등을 기대고 앉으며 아오미네가 퉁명스레 물었다.

 

"뭐야."

 

"아앗, 역시 아오미넷치 깨어있었슴까. 아아, 시시해라."

 

"본론으로 후딱 들어 가."


단호한 말에 키세가 눈을 살짝 접은 채로 웃으며 아오미네의 앞에 앉았다. 마주 앉아 아오미네를 유심히 살펴보던 키세는 아오미네의 미간에 줄이 그어지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본론으로 들어갔다.


"보스가 죽었슴다."


"알아, 멍청아."


"후계자는 보스보다 먼저 죽었슴다. 보스의 자식들은 진짜 많구여."


"안다고, 바보야."


"……아, 진짜 말 끊지 마세여!"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태클을 거는 아오미네에게 버럭 소리를 지른 키세는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화를 억누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본론은 이검다. 아오미넷치는 어쩔 검까? 지금 세력 다툼 중이라구여."

 

"그걸 왜 나한테 묻냐. 니 일은 니 일, 내 일은 내 일. 알려주기 싫은데."

 

"당연히 저도 아오미넷치가 고른 사람으로 보스 밀 생각이니까 그렇죠. 아오미넷치가 지지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보스가 될테니까."

 

저 녀석이라면 2인자인 언더보스 자리를 꿰차려고 할 줄 알았는데. 아오미네는 찌뿌둥한 몸을 풀며 의아함을 가득담은 눈빛을 키세에게 보냈다. 키세는 야망이 큰 남자였다. 그런 그가 자신이 미는 사람을 지지하겠다니. 무슨 생각인건지.

 

"…딱히 없어."

 

"아, 아니면 아오미넷치가 보스가 되어도 상관없는데."

 

"네 놈이 이런 선택지를 고를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눈을 가늘게 뜨고 아래위로 키세를 훑어보자 키세가 살짝 웃었다. 여기는 역시 삭막하네여, 라며 태평한 소리를 중얼거린 노란 녀석은 다시 자신과 눈을 맞추며 검지손가락으로 탁자를 톡 톡 쳤다.

 

"지킬 게 있는 남자는 조심스러워지는 법이거든여."

 

"아아, 그 사람이냐."

 

전에 키세가 데려온 검은 스포츠머리의 사내를 떠올린 아오미네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녀석이 남자취향이라는 건 예전부터 알던 거고. 꽤나 오래 가네, 싶었는데 진심이 되었는건지 제법 의젓한 말을 한다. 신입 때는 완전 날이 서있는 오만한 녀석이었는데 말이다.

 

"아, 저는 이제 가봐야겠슴다. 결정 내리면 언제든 말해주세여."

 

몸을 일으켜 나가기 위해 문 앞까지 걸어가던 키세가 중간에 몸을 살짝 돌려 아오미네를 향해 짓궂은 미소를 건넸다. 그리고 은밀한 속사정을 얘기하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 누가 한 지 저 알고 있으니까."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이내 키세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

 

알고 있다, 라. 아오미네는 현관문 앞에 서서 인상을 찌푸렸다.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은 불에 휩싸여 저택과 함께 사라졌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된 이상 녀석도 죽여야 하는 건가. 턱을 매만졌다. 아무래도 여기에 발을 내딛은 초반부터 동고동락한 동료인지라 조금 고민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앞길에 방해가 된다면 죽여버리는 게 이롭지 않을까. 키세 료타는 화려함 속에 무엇을 품고 있을지 모르는 위험한 남자였다. 적으로 돌려서 좋을 것은 없었지만 같은 편이라고 해도 불안해지는 것도 매한가지였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답을 못 내리겠다. 그에게 물어보는 것이 더 현명한 결론을 내릴 수 있겠지. 아오미네는 현관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시야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붉은 머리의 사내였다. 피식,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낸 아오미네는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상대 또한 살짝 웃으며 손을 뻗어 아오미네의 목을 끌어안았다.

 

"다이키."

 

"아, 아아."

 

그의 목 언저리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아오미네가 고개를 살짝 들어 시선을 맞췄다. 빨간 눈동자와 노란 눈동자가 자신을 꿰뚫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연인의, 아카시의 살짝 눈이 휘어진다고 느꼈을 때 그의 붉은 입술이 다시 열렸다.

 

"자, 이제 나를 보스로 만들어 주겠어?"

 

아오미네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나선 아카시의 입술에 살짝 입맞춘 뒤 흔들림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가 그 자리를 원한다면."

 

 

 

[쿠로바스/청황]이별후애(異別後愛)

쿠로바스 | 2015. 3. 1. 12:06
Posted by 물빛녘

※[쿠로바스/청황]이별(http://teato263.tistory.com/16) 의 외전격 스토리입니다.

이별을 보셔야 이해가 빠르리라 생각합니다.

 

※異別後愛(이별후애) : 이별 후의 사랑

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厚愛 (후애) : 깊이 사랑함

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한자는 다르지만.)


[쿠로바스/청황]이별후애(異別後愛)

written by. 티토

 

"헤어져요."

 

 연습한 듯 담담한 어조. 미련을 버린 듯한 행동. …그래, 그게 너가 원하는 거라면.

 

"알았어."

 

 사랑하던 사람으로부터 이별선고를 받았다. 눈을 마주치지 않던 너는 단숨에 자기 할말을 내뱉고는 입을 다물었다. 이별, 이라. 그 말은 피부로 와닿지 못했다. 외면하려고 했다는 게 적당한 말일지도 모른다. 직시하려고 하지 않았을 뿐, 사실은 예감하고 있던 것일지도. 살짝 눈을 내리까니 너의 정수리가 보였다. 왜 눈을 보여주지 않는 걸까. 미안한 감정이 들어서? 꼴보기 싫어서? 이유가 뭐가 되었든 그게 네가 원하는 거라면, 나는 모든지 해 줄 수 있다. 그러니까 그런 상처받은 눈은 하지 마라.

 

 사랑이라는 것을 했다. 아직 고교생 1학년밖에 안되는 녀석이 뭔 사랑이겠냐 싶겠지만 사실이다. 처음 본 순간부터 원인 모를 사랑에 빠졌다. …너는 모르겠지만. 곁에 있으면 입꼬리는 점점 올라가고, 심장은 세차게 뛰었다. 우는 모습도, 웃는 모습도, 화난 모습도 너라면 좋았다.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감에 젖어있을 수 있었으니까. 나는 이랬건만 너는 어떤 기분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나와 있던 시간들은 어땠어, 키세?

 

 네가 뿌리쳤던 내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 이 손을 네가 잡을 날은 없다. 괜한 감상에 젖어 있는 내가 우스워 상체를 숙여 차가운 유리테이블에 뺨을 갖다 대었다. 정신이 멀쩡해질수록 네 얼굴은 더욱 또렷하게 머리속에 떠올랐다. 결국 숙였던 상체를 다시 들었다. 눈 앞에 앉아있는 테츠의 표정이 보기 싫을 정도로 험악해져 있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눈 앞의 케이크를 먹기위해 포크를 들던 나는 다시 손을 응시했다.

 

 잡지 않았다, 가 아니라 잡지 못했다. 나는 이미 너에게 수많은 상처를 입혔고 그것은 회복될 수 없는 흉터로 남았다. 그런 내가 너를 잡는다는 것이 가당키나 할까. 너를 잡는 내 모습이 상상되어 웃음이 나왔다. 우스운 일이다. 나는 너를 잡을 권리가 없었고, 나는 결국 너를 떠나보냈다. 그건 변함없는 사실이다.

 

 한참을 손만 보고 있자니 앞에 앉아있던 테츠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오미네 군, 너나 키세 군이나 답답하군요."

 

 신랄한 어조로 말한 테츠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옆에 앉아 있던 사츠키는 키-쨩이 안 받아ㅡ!, 라며 울상을 지었다. …왜 전화하는 거냐, 넌. 설마 그 녀석이 극단적인 선택을 할 거라 생각한거냐. 사츠키가 폰을 내려놓자 그럼 제가 다시 걸어보죠, 라며 테츠가 폰을 들었다. 번갈아가며 몇 번이나 그 짓을 하던 둘은 나를 응시했다.

 

"아오미네 군이 전화를 걸어보세요."

 

"맞아, 다이쨩이라면 받을지도 모르고. 둘 사이의 일이니까."

 

 포크로 케이크를 헤집어 놓던 나는 잠시 엉망이 되어버린 케이크 조각을 응시하다 시선을 살짝 올려 테츠를 바라보았다. 냉담한 시선과 부딪혔다. 잠시 그 시선을 받아내던 나는 입술을 조금 움직여 말했다.

 

"싫어."

 

"…다이쨩!"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츠키의 고음이 귀를 찔렀다. 고막 터지는 줄. 귀를 막고 흘겨보자 사츠키도 가게 안을 가득 채운 자신의 목소리가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붉혔다. 다행인 소리지만 지금 가게 안에는 우리 셋을 제외한 손님은 없었다. 카운터의 점원과 눈이 마주치자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사과를 건넨 사츠키는 얼굴을 확 굳히며 나를 노려봤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전화해서, 받아서, 그래서 뭐."

 

"…뭐, 뭐냐니. 화해해야지. 다이쨩이랑 키-쨩 싸운 거 한 두 번도 아니니까 금방 화해할 수 있지 않을까…. 무, 물론 이번은 좀 심했지만."

 

 힐끔 사츠키의 얼굴을 보다 포크로 다시금 케이크를 헤집었다. 온통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케이크에서 떨어져나온 부스러기가 접시 밖으로 떨어졌다. 포크로 간신히 들어 접시에 올려놨다. 그리고 꾹꾹 눌렀다. 원상태로 돌아가지 않는다. 먹음직스럽던 케이크 조각이었건만 이제는 보기 흉한 꼴이 되어 있었다. 물론 내가 한 일이지만.

 

"그래서."

 

"그, 래서라니?"

 

"즉, 아오미네군은 지금 상황이 해결된다고 해봤자 언젠가는 이런 일이 재발할지도 모른다, 이 말씀이신가요?"

 

 말없이 나와 사츠키의 대화를 지켜보던 테츠가 정리하듯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자 기가 찬 듯 사츠키가 한숨을 내쉬었다. 열심히 헤집던 포크를 내려놓고 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꼴에 레몬에이드라고 레몬을 잔에 끼워넣은 게 눈에 들어오자 나도 모르게 바람빠진 웃음소리가 나왔다. 노란색만 보면 어째 너가 떠오르냐. 샛노란 머리카락, 레몬색 눈동자. 살짝 웃음을 머금고 레몬조각을 집었다. 입으로 가져가 베어물었다. 시다. 신 맛이 입 안에 퍼졌다. 장난 삼아 네 목덜미를 물었을 때는 이렇게 신 맛은 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오미네 군."

 

"왜."

 

"후회하지 않으실 자신은 있으신 겁니까."

 

 후회? 삐죽 웃으며 대꾸했다.

 

"후회고 자시고 간에 이쪽은 차인 쪽인데, 질문을 한 상대가 잘못된 거 아니냐."

 

 이미 끝이 난 관계다. 이 사실에 관해 이러쿵 저러쿵 할 처지는 아니라는 거다. 차일 때 아무 말도 않고 있다가 나중에 가서 매달리는 일은 구차할 뿐이다. 무엇보다도 키세가 그걸, 헤어지는 걸 원한다, 잖냐.  그걸로 얘기는 끝, 아니냐.

 

"저, 다이쨩. 키-쨩이 홧김에 얘기한 건 아닐까? 참다가 참다가 펑, 이라는 것처럼. 키-쨩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건 다이쨩밖에 없으니까. 진지하게 얘기를 나누다보면 다시 사이좋게, 응?"

 

 사츠키의 음성이 애원조로 바뀌었다. 친한 친구와 소꿉친구 사이에 있는 것이 부담인건지 안절부절못하는게 누가봐도 안쓰러울 정도다. 대꾸없이 턱을 괴며 포크를 허공에 휘둘렀다. 참았다, 라. 상대의 불의를 참는다, 화를 참는다, 눈물을 참는다……. 애초에 그걸 여태까지 나에게 얘기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냐, 라고 대꾸하려다 쓴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러는 나는 뭔가 들어줄 자세는 되어 있었던가. 연인이라며 좋아한다며 그랬던 나는 내 얘기만 하기 바쁘지 않았던가. 늘 나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던가. 그런 내가 뭐? 이런 내가 너를 잡을 수는 있었던 거냐.

 

"안 봐도 뻔하죠. 이유도 묻지 않고 알았다고 했겠죠, 아오미네 군이라면. 그래서, 키세 군께 할 말은 없는 겁니까?"

 

 키세에게 할 말? 글쎄. …키세, 너는 내게 첫사랑이었다. 표현을 할 줄 몰랐던 나는 어린아이처럼 굴었다. 속마음을 너에게 들려주지 않았다. 사랑했다, 사랑한다, 앞으로도 나에겐 너 뿐.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하고 싶은 말들을 나열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나는 왜 지금에서야 이 말들을 떠올린 걸까. 조금 더 솔직할 수 있지 않았나. 그렇다면 네가 힘들 일도, 외로울 일도 없지 않았을까. 자신만 생각하고 있는 나를 보며 너는 어떤 감정이 들었을까. 나라는 놈을 만나면서 너는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나와 데이트라는 걸 할 때 너는 무엇을 떠올렸을까. 아무 말없이 너의 몸만 탐하는 나를 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그리고 지금은 뭘 하고 있을까.

 

"아, 젠장."

 

 머리를 헤집었다. 왜 이렇게 네가 보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네가 원한다면 보내 줄 자신이 있었다. 너의 행복을 지켜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지금 너의 손을 잡지 못 했던 내 손이 원망스러운 거냐. 이를 악물었다. 나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늦어서 미안."

 

 카가미가 헐레벌떡 가게 안으로 뛰어왔다. 테츠 옆에 자리 잡은 녀석이 키세를 봤는데, 라고 말을 꺼냈다. 테츠가 나를 힐끔 보더니 어디서 보셨나요, 라고 묻자 가게 근처 길거리 농구 코트에서,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폰을 들어 번호를 누르면서 테츠가 말했다.

 

"후회할 일은 하지 마세요. 그건 …중학교 때 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게를 박차고 나왔다.

 

 근처 길거리 농구 코트를 찾아 걸어갔다. 걸어가는 내내 속은 불안감에 썩어 문드러졌다. 이제와서 무슨 말을 해야하는 걸까. 이 관계를 되돌릴 수는 있는 걸까. 어떻게 해야 네가 돌아올까. 내가 잘못했다, 돌아와 달라? 모르겠다. 뭐가 정답인지 오답인지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생각하는 걸 그만두자. 그저 솔직하게 내 얘기를 하자. 너가 듣고 싶어했지만 꺼내지 않았던 내 속마음을 들려주자.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하자.

 

 멀리 너가 보였다. 나를 발견한 건지 너는 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짓게 한 것이 나라는 걸 떠올리자 나도 절로 쓴 웃음이 나왔다. 네가 한손으로 튕기던 공이 내 쪽으로 굴러왔다. 공이 내 신발을 툭, 하고 쳤다. 주울까 잠시 고민하다 너를 향해 시선을 되돌렸다. 그리고 자신을 잊어달라는 네 목소리가 들려 왔다. 목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든다. 그 때와 같다. 너가 헤어지자 했던 그 날도 아무말도 꺼낼 수 없었다. 네가 원하는 결말이 이거라 생각하자 잡으려던 손은 내려갔다. 지금도 나는 네 말에 응, 이라고 답했다. 이렇게 나와 너는 모르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정말 이게 네가 원하는 결말? 나는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끝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정말 염치없는 짓 한 번만 할게. 앞으로, 절대 너에게 하지 않을 짓을 마지막으로 한 번만 하게 해 줘.

 

 발치에 있던 공을 잡아 들었다. 그리고 그 날처럼 공을, 농구공을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면서 공이 날라갔다. 그리고 그 때처럼 명중. 너는 당황한 듯 이마를 붙잡고 나를 바라봤다.

 

"…미안. 오, 처음 뵙겠습니다, 카이조의 키세 료타 군? 첫눈에 반했습니다만, 저와 교제해 주시겠습니까?"

 

 …이제 절대로 놓지 않을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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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키세, 아오이마, 카사키세


[쿠로바스/청황/청금/립황]같은 곳에 서서

written by. 티토

 

 

 한 눈에 반했다. 단박에 사랑이라 느꼈다. 중학생이었던, 어렸던 우리는 그렇게 사랑이라는 것을 시작했다. 


 언제까지나 같은 곳에 서서 같은 곳을 바라볼 줄 알았다.


*


 첫 눈에 반했다, 라는 건 믿지 않았다. 드라마에 흔히 나오는 가슴이 간질간질해지는 감정따윈 딱히 알고 싶지도 않았을 뿐더러 느낄 일도 없을 거라 생각했다. 첫 눈에 반한다는 거, 얼굴보고 반한다는 거잖아. 그 사람이 어떤 성격의 소유자인지도 모른 채 반한다는 게 말이 되는 걸까.


ㅡ라는 건 예전에 가졌던 생각. 어릴 때부터 고수해오던 신념에 가까운 생각은 그를 본 순간 무너졌다. 농구공에 머리를 맞아 순간 정신이 이상해서일지도 모르지만 어찌되었든 내가 그에게, 아오미네 다이키라는 사내에게 한 순간 마음을 빼앗겼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리라. 햇볕에 지나치게 그을린 피부에 땀냄새 나는 그가 뭐가 그리도 멋져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심장이 덜컥 거렸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다 그가 있을 농구부로 발걸음을 옮겼던 게 중2 봄날의 일. 체육관에서 봤던 그의 플레이에 넋을 놓고 있다가 그 날 부로 부장을 찾아가 입부 신청서를 냈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조금이라도 더 선명히 보고 싶었기에.


 사랑이라는 감정을 믿지 않던 나였지만, 그 순간의 감정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건 소위 말하는 운명같은 사랑이라고.


*


 솔직히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소문 속의 여자애들의 우상이 누군지 궁금해서? 글쎄, 그것도 그랬던 것 같고. 아마 그의 얼굴이 보고 싶었던 것 같다. 얼마나 잘 생겼길래 여자애들이 사족을 못 쓰나 궁금해서가 가장 적절한 답이지 않을까. 누가 들으면 자랑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소꿉친구인 사츠키는 남자애들이 소개시켜 달라고 할 정도로 한 미모를 했기에-나는 잘 모르겠다만- 나름대로 나는 눈이 높은 편이었다. 그래봤자 보통에서 위겠지, 라고 생각했었다.


 다만 그건 농구공을 던져 그의 이목을 집중시킨 후 봤던 그의 얼굴을 본 순간 철회. 이게 정말 인간의 얼굴이냐 할 정도였다. 태연함을 가장해 인사를 건넨 후 농구공을 받아 들고 체육관으로 뛰어갔다. 나, 떨고 있진 않았겠지.


 요새 애들은 조숙해서 유치원 때, 소학교 때 한다는 첫사랑도 한 번 못 해봤던 나였지만 심장이 쿵쾅쿵쾅거리고 계속 그 사람만 생각난다는 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 것인지는 알았다. 아, 이게 사랑이라는 감정이구나. 찡그린 표정의 그를 웃게 해주고 싶었다. 계속해서 뛰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해 잡념을 떨쳐 버리기 위해 연습경기를 하고 있던 무리에 뛰어 들었다.


 그걸 통해서 그 녀석이 농구부에 입부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깜짝 놀랐다.


 앞으로 내 심장은 무사할지 걱정이 되었다.


*


 여름합숙 마지막 날이었다. 성공리에-라고 말하는 건 뭐하지만 무탈하게 끝났으니- 합숙을 마친 것을 축하하며 불꽃놀이를 하게 되었다. 하늘을 수놓는 불꽃을 보며 감탄사를 터트리고 있을 때였다. 예상치 못한 고백을 받았다. 그것도 그에게.


 굉장히 얼빵한 표정을 지었겠지만 다행인지 주변은 어두웠다. 안 그랬으면 붉어진 얼굴을 숨기지 못해 안절부절했을테니까.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그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폭죽소리와 함께 잠깐의 입맞춤.


*


 그 날 고백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남자와 남자이니만큼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했던 내가 조바심을 냈던 건 그를 좋아하는 게 나뿐이 아니었으니까. 언젠간 다른 녀석의 손에 넘어간다고 생각하니 여유라는 게 사라졌다. 그래서 부원 모두가 불꽃놀이에 정신 팔려 있을 무렵 그를 따로 불러냈다. 어두워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어울리지도 않게 얼굴이 붉어진 모습을 보여줄 뻔 했다.


 놀란 녀석이 입만 쩍 벌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주저하다가 손을 내밀었다. …그나저나 저 녀석은 놀란 모습도 예쁘냐.


 내민 손에 온기가 느껴졌다. 하늘에서 터지는 불빛으로 어렴풋이 보이는, 살짝 고개 돌린 그의 뺨은 붉게 물들어있었다. 이것도 예정한 바는 아니었다만 분위기에 취해서인지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가져가 대었다.


 아아, 심장 터질 것 같아.


*


 첫 데이트였다. 생애 첫 데이트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의 첫 데이트. 이때까지 사귀었던 여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며칠 전부터 기다리던 데이트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머리를 만지기도 하고 안경을 썼다 벗었다를 반복하고 옷장 안에 있던 옷들을 침대에 늘어놓고 패션쇼를 하는 등 부산하게 준비를 했다. 작은 누나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데이트하니, 라고 물었다. 그렇게 티 나나. 헤죽 웃으면서 응, 이라고 대답했다. 아아, 정말 좋아.


 …비록 데이트 목적이 농구화 사러가는 것이기는 하다만. 뭐, 아무렴 어때. 주말에도 같이 있을 수 있는데.

 

*

 

 나는 정말 바보입니다…. 농구화 사러 가자, 가 뭐냐고. 정말 데이트 신청하는 녀석 중에 이렇게 한심한 걸로 신청하는 건 나밖에 없을 거다. 그 녀석은 여태까지 많은 데이트를 해왔을 게 분명한데, 얼마나 한심하게 보였겠냐고. 침대를 뒹굴며 한심했던 내 모습을 비웃었다. 머리가 정전기로 인해 부스스해진 것을 거울로 확인한 후 욕실로 들어갔다. …일단 찬 물을 맞으면서 정신 차리는 게 먼저다.

 

*

 

 첫 데이트는 무사히 마쳤다. 농구화를 산 뒤 헤어지기 싫어 아이쇼핑을 하러 돌아다니던 우리는 우연히 영화관 앞을 지나쳤다. …아니, 지나치려 했는데 내가 그를 붙잡았다. 마침 보고 싶었던 영화가 있었는데, 같이 봐 주면 안 되냐고 조심스레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세.

 

 팝콘을 사러 그가 자리를 떴다. 매표소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서있을 때 주변에서 키세 료타가 아니냐고 수근거리는 소리에 애써 모른 척 시치미를 뚝 떼었다. 무도수 안경을 살짝 치켜 올린 후 영화관 직원 앞에 섰다. 그러니까 저 영화 표 두 장 주세요, 라고 말하니 직원도 혹시 키세 료…, 라고 묻길래 아니라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일이나 하시죠. 표를 받아든 후 팝콘을 사들고 기다리는 그에게 다가갔다.

 

 무슨 영화? 액션영화임다.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며 안으로 들어갔다. 영화 선택은 좋았다. 적절한 액션씬과 적절한 로맨스. 그리고 그와 함께 관람.

 

*

 

 마침 그가 보고 싶은 영화가 있어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아이쇼핑만 하다가 헤어질 뻔했다. 첫 데이트가 순식간에 끝날 뻔.

 

 내가 팝콘을 사겠다고 하자 그는 자신이 표를 산다고 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팝콘을 사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주변에서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힐끔 뒤를 보니 그는 주변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걸로 인해 다른 사람들은 긴가민가하며 말을 걸까 말까 주저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하, 웃음이 절로 나왔다. 너희들의 그 '키세 료타'가 내 애인이라고. 어깨를 주욱 펴고 이상하게 나를 보는 직원에게서 팝콘과 콜라 두 잔을 사 들었다.

 

 그나저나 무슨 영화지. 표를 사 들고 걸어온 그에게 물었다. 액션영화임다. 싱긋 웃으며 그가 대답했다. 액션 영화 좋아하거든요, 라고 덧붙인 그는 내게서 콜라 하나를 받아들어 주욱 마셨다. 나도 액션 영화 좋아하는데, 애써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우와, 진짜요? 똑같다ㅡ. 환한 미소와 함께 그가 그렇게 말하자 심장이 쿵 떨어질 것 같았다. 우, 우와…, 잠시라도 방심하면 안 돼.

 

*

 

 그가 변했다, 라고 느낀 건 언제부터였나. 순수하게 농구바보이던 그는 어디로 간걸까. 공식전때의 그는 뭔가 이상했다. 혹시 기분탓일까 싶어 그와 친한 쿠로콧치한테도 물어봤지만 똑같은 감상평이 돌아왔다. 강해지면 더 재밌어지는 게 아니었던걸까. 나를 대하는 건 평소와 비슷했지만 농구에 관해서는 달랐다. 아냐, 이건 정말 아냐. 내가 좋아했던 건 농구를 좋아하고 열심이던 그였다. 이렇게 변해버린 그에게 더 이상 가슴은 두근거리지 않았다. 아아, 조금 변했다고 이렇게 마음이 쉽게 변해버리는 걸까. 어색한 내 모습에 쓴 웃음이 흘러 나왔다. 자조적으로 웃던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나도 농구가 지겹다는 느낌이 뭔지 알게 되었다.

 

*

 

 컨디션이 좋다, 일 뿐이었다. 그러나 올해도 잘 부탁한다던 상대는 포기한듯 경기에 임했다. 지금, 장난, 치는 거냐고. 어이없음에 그를 돌아보자 '괴물'이라는 말이 돌아왔다. …아아, 젠장. 이게 뭐가 즐거워. 이럴 줄 알았으면 연습에 열심히 임할 필요는 없었는데. …연습? 그렇구나, 내가 연습을 안 해도 나를 따라올 사람은 없어.

 

 그는 여전히 좋다. …아니,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건 마치 그저 의무감에ㅡ.

 

 1 on 1하자고 조르던 그가 좋았는데 지금은 그저 귀찮을 따름이다. 영원하리라 믿었던 감정은 결국 변해버렸는가. 변해버린 내 모습에 쓰게 웃었다. 그렇지만 그건 그 때뿐.

 

*

 

 카이조에 진학했다. 이유는 교복 색. 좋아하던 그의 색. 바다같은 색에 매료되어 정신차리고 보니 카이조에 입학을 한 상태였다. 당연한 거지만 카이조 농구부에 스카우트해서 오게 된 나는 체육관으로 향했다.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능력만이 중요할 뿐. 그렇게 오만방자하게 굴었던 나를 카사마츠라는 사람이 꾸짖었다. 넌 카이조의 1학년 키세 료타다. 그 말이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들었다.


 나는 카이조 농구부의 1학년 키세 료타.


*


 토오에 진학했다. 이유는 간단. 연습을 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뭐 잔소리꾼 사츠키가 따라왔긴 했다만 그러던가 말던가. 옥상에 들어누워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 때만 해도 그랑 같은 학교에 진학할 거라 생각했는데. 매일 얼굴을 보며 행복할 거라 생각했는데 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카이조, 라던가. 카나가와까지 간 그는 이제 정말 나와 멀어졌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했는데, 이 경우는 반대인가.


 마음이 멀어지면 몸도 멀어진다.


*


 키세, 무리하는 거 아니냐. 세이린과의 연습시합에서 진 후 모델 일도 그만두고 연습에 열중하던 나에게 카사마츠 선배가 말했다. 괜찮슴다, 다음번에 리벤지해야하니까요. 경쾌하게 대답한 내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선배는 핫, 하고 웃으며 나에게 발차기를 날렸다. …어째서?! 얼빵하게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선고하듯 카사마츠 선배가 말했다. 너무 과하게 해도 안 좋아, 조금 쉬도록 해, 바보 녀석같으니라고. 그렇게 강제로 연습 중지 당했슴다…. 우울한 표정을 띄우고 쉬고 있던 모리야마 선배에게 가서 꿍얼거렸다. 그러자 선배는 푸하하 웃음을 터트리셨다.

 

 그게 그 녀석 나름대로 생각해주고 있는 거야, 뭐 연습도 과하면 독이 될 수도 있으니까. 여자만 밝히던 모리야마 선배에게 나온 말에 감탄사를 내뱉다가 문득 카사마츠 선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약간 붉어진 귓볼. …어, 어라? 열이 볼로 몰리는 기분이 들어 양손을 뺨에 가져갔다. 어라, 너 빨갛다?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모리야마 선배의 말은 뇌로 전달되지 않고 다른 귀로 빠져나왔다.

 

*

 

 저 녀석 연습 너무 안 한다고요, 에이스라지만 너무 오냐오냐하시는 거 아닙니까?! 분하다는 듯 씩씩거리며 와카마츠-선배라는 칭호따위 붙이지 않는다-가 말했다. 그러자 음험한 안경잡이는 단상에 누워 빈둥거리는 나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 웃음 뒤에 들려온 말은 더 가관이었다. 냅두레이, 경기 때 잘 하면 되는 기다. 관서 사투리로 흥분한 와카마츠의 말을 자른 주장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히죽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떨떠름해진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와카마츠의 손에 들려 있던 공을 빼앗아 골대로 던졌다. 공을 빼앗겨 쨍알거리던 와카마츠는 내가 던진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골대에 매끄럽게 들어가자 입을 다물었다.

 

 능력주의. 베베 꼬인 녀석들이 가득한 이 곳도, 실력만이 중요한 이마요시라는 사람도, 감독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아니, 오히려 나란 녀석에게는 딱일지도 몰라. 다시금 이마요시 상과 눈이 마주쳤다. 피하지 않고 나 또한 피식, 웃어줬다. 그 바람에 그 사람의 눈동자가 살짝은 보인 듯 했다.

 

*

 

 인터하이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여전했다. 독보적인 플레이도, 자신감 넘치는 그 자신도 뭐 하나 바뀐 게 없었다. 그걸 보고 나는 안심을 했던가, 실망을 했던가.

 

*

 

 언젠가 붙을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그게 고교 진학 후 첫 공식경기에서일 줄이야. 녀석은 달라져 있었다. 테츠네 학교와 했던 연습경기의 영향인가. 그가 나를 카피했단 사실을 놀라웠다만 그 뿐. 마지막 실수는 정말 눈 뜨고 못 봐줄 정도였다. 내 농구에는 동료에게 의지하는 것 따윈 없어, 키세.

 

*

 

 졌다. 눈물이 끊임없이 흘렀다.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서지 못 하는 나에게 카사마츠 선배가 손을 내밀었다. 선배가 일으키다시피 해서 일어선 나는 선배에게 기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아, 나는 아직도 그를 뛰어 넘을 수 없는 걸까. 그의 농구를 좋아했다. 그를 동경했다. 그를 사랑했다. 그렇지만 그건 이제 끝이다.

 

 아오미넷치와 나의 인연은 여기서 끝.

 

*

 

 이겼다, 해도 기쁘지 않았다. 그가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내게 손을 뻗을 권리는 있는 걸까.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가끔 만났다. 그렇지만 그건 의무감에서 나온 것일뿐 두근거림은 배제된 담백한 관계였다. 가끔 만나서 데이트같은 걸 하고 관계를 가진다. 이런 게 연인이라는 건 맞는 걸까. 괜찮냐는 이마요시 상의 물음이 들려왔다. 아니, 괜찮지는 않다. 그렇지만 이제 괜찮아져야 한다. 첫사랑이었다. 한 눈에 운명이라 믿었다. 그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내 감정을 과신했다.

 

 키세와 나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다.

 

*

 

 우리는 중 2 봄날 운명처럼 만났고, 사랑에 빠졌다. 운명이라 믿었다. 같은 곳에 설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우리는ㅡ.

 

 ㅡ우리는 같은 곳에 서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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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바스/적황]시험공부

쿠로바스 | 2015. 3. 1. 11:55
Posted by 물빛녘

※아카키세

[쿠로바스/적황]시험공부

written by. 티토



 사각 사각, 샤프 소리만 들려온다. 눈 앞의 문제에 집중하려했지만 검은 건 글이요 흰 건 종이일 뿐, 문장으로 도저히 다가오지 않았다. 우우, 집중 안 돼. 시무룩한 표정으로 문제집에 낙서를 하고 있을 때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들자마자 붉은 눈동자와 아이컨택. 흠칫 몸을 떨자 '추워?'라는 물음이 들려왔다.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나를 향했던 시선이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빠르게 움직이는 손을 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수학문제가 저렇게 쉽게 풀리는 거였던가. …아니, 전혀. 너는 공부에 가망이 없다며 지금부터 살 길을 찾자고 모델 일을 권유했던 것이 바로 큰누나였다. 가족 회의에서 연설하다시피 말한 큰누나의 의견은 만장일치로 통과ㅡ. 아, 암울해졌다.


"키세?"


 걱정스런 목소리로 눈 앞의 남자가 물었다. 칭얼거리며 테이블에 엎어졌다. 죄송함다, 아카싯치! 이번 시험은 무리임다! 낙제 확정…. 히터도 제대로 안 틀어주는 교실에서 겨울방학 보충학습은 확정. 울고 싶다, 진짜…. 방전상태에 돌입한 내가 웃겼는지 풋, 하고 내 머리 위에서 웃음이 터졌다.

 

"우우, 너무 함다. 저는 나름대로 심각한데."

 

"하하, 미안. 뭔가 모르는 문제라도 있어?"

 

 상체를 벌떡 일으켜 좀 전까지 관찰하고 있던 문제집을 앞으로 내밀었다. 아카싯치가 문제집을 받아들어 테이블에 올려놓자 손을 뻗어 이번 시험범위의 맨 앞부터 문제집 제일 뒷장까지 팔랑팔랑 넘긴 뒤 당당하게 외쳤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다아 모르겠슴다!"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한데."

 

 아카싯치가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중얼거렸다. 저번 시험에 낙제가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이 기적이었슴다, 라고 하면 아카싯치는 무너지지 않을까. 미안한 마음에 애꿎은 지우개만 잡아 뜯었다.

 

 내가 아카싯치의 초호화 저택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까닭은 시험기간이기 때문이었다. 덧붙이자면 나와 같이 아슬아슬한 성적의 소유자인 아오미넷치는 미도리맛치와 모못치가 달려들어 교육 중이라고 한다. 나는 입학 이래 수석을 놓치지 않는 아카싯치가 맡게 되었다. …죄송함다, 아카싯치. 힘내세요, 미도리맛치, 모못치. 농구부 주전인 나와 아오미넷치가 전교 뒤에서 노는 성적의 소유자여서 피해를 받고 있는 세 사람에게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을.

 

"정말 곤란한걸, 이 상태로 가다간."

 

 여유로움을 되찾았는지 싱긋 웃으며 말한 아카싯치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 앞으로 걸어갔다. 수많은 책들 가운데 투명단권파일을 몇장 꺼내 들고 와 그 중 하나를 내게 건넸다. 이게 뭐지? 눈을 두어번 깜빡이다 시선을 내려 글을 확인하니 요점정리였다. 그것도 보기 쉽게 정리된. 입이 쩍 벌어졌다. 종이를 한 장 꺼내 글을 읽어내려가던 나는 아카싯치를 바라보며 엄지를 치켜올렸다.

 

"대단함다, 아카싯치! 지, 지리가 이렇게 쉬울 줄은!"

 

"너무 띄워줘도 곤란한데. 자자, 귀로 듣는 게 더 효과적일테니까 설명해줄게."

 

 종이를 여러장 들고 온 아카싯치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카싯치, 정말 좋아!

 

*

 

"오늘은 이정도로 할까."

 

 수많은 종이들을 정리하며 아카싯치가 오늘의 수업 종료를 선언했다. 우아아, 힘들다. 테이블에 엎어졌다. 정리가 잘 되어있는 노트에 친절한 설명까지 곁들여 최고의 수업이었다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수업을 듣는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더군다나 움직이지 않고 집중한다는 것은 더더욱. 팔을 주욱 내밀며 몸을 풀었다. 불평 안 하고 잘들어줬는걸, 이라는 말에 히죽 웃었다. 아카싯치의 드문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정말 저 잘했슴까?"

 

"응. 지루할텐데 끝까지 집중해서 들었잖아. …그나저나 아오미네 쪽이 걱정인걸. 미도리마와 모모이를 붙여놓긴 했지만…. 미도리마와 아오미네는 상성이 안 맞으니까."

 

"아카싯치 설명 재밌었슴다! 에에, 그렇네여. 근데 그렇다고 무라사키바랏치에게는 조금…. 아, 쿠로콧치는요?"

 

"쿠로코는 아오미네와는 농구 이외에 안 맞는 편이니까. 더군다나 부족한 공부에 집중하고 싶다고 먼저 거절 의사를 밝혔거든."

 

 흐음, 그렇슴까.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하기야 아오미넷치나 쿠로콧치, 둘의 말에 따르면 농구 이외에는 전혀 맞는 구석이 없다고 했으니까. 아카싯치가 정리한 파일들을 내게 내밀었다. 어라, 이거 뭠까?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를 보자 싱긋 웃으며 들고 가라는 말이 들려왔다.


"에, 힘들게 정리한 건데 저 주셔도 되는 검까?"


"아아, 이거 키세 주려고 따로 정리한 거니까. 내 껀 여기."


 다른 파일 뭉치를 가리키며 살짝 웃은 아카싯치가 입을 다물며 턱을 만지작거렸다. 갑자기 왜 그러는 거지? 그의 행동이 이해가지 않아 멀뚱히 지켜보고 있자 이내 아카싯치가 고개를 들며 깨달음을 얻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뭐야?


"열심히 했으니까 상을 줘야겠지?"


"상…임까?"

 

 얼떨떨한 기분이 들어 뜸을 들이며 반문하자 아카싯치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나를 향해 뻗었다. 응? 뺨에서 온기가 느껴진다 싶더니 뭔가 말랑한게 뺨에 와닿았다. 응, 뭐야? …어라?

 

"아, 아카싯치?!"

 

"수고했어, 키세. 내일도 열심히 하면 해줄게."

 

 아카싯치의 미소에 나는 또다시 테이블에 엎어졌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우우, 반할 거 같아.

 

[쿠로바스/적황]복종

쿠로바스 | 2015. 3. 1. 11:39
Posted by 물빛녘

※아카키세

[쿠로바스/적황]복종

written by. 티토

 

 

 비릿한 피냄새가 코를 찔렀다. 밀려오는 공포에 몸을 떨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난걸까. 시야가 눈물로 인해 뿌옇게 흐려졌다. 안 돼, 료타, 나를 봐야지. 서늘한 목소리에 힘겹게 고개를 들자 익숙한 붉은 머리가 보였다. 아카싯치. 조심스레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이랬던가. 아니, 중학교 때의 그는 다소 권위적이긴 하나 친절했다. 상냥했고 자신의 감정을 내보이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지? 뺨에 와닿은 차가운 손에 놀라 흠칫하자 그가 낮게 웃었다. 진짜 아카싯치가 맞는 걸까. 얼굴이 닮았다고 내가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자, 착하지, 료타."

 

 힐끗 눈동자를 굴려 옆을 보니 싸늘하게 변한 사람들이 보였다. 좀 전까지 나와 얘기하던 모델 친구들이었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지? 그였다. 바로 내 눈 앞에서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그가 한 짓이었다. 도대체 왜? 수많은 의문들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이내 곧바로 그의 손에 의해 강제로 들리긴 했다만.

 

"료타."

 

"네."

 

 입술을 파르르 떨며 대답하자 만족스러운지 생긋 웃은 그는 엉망이 된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뒷정리 귀찮겠는걸. 사람을 죽였는데도 태연한 어조였다. 얼마나 이런 것에 익숙한 걸까. 주위를 둘러보던 그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왼쪽 눈꺼풀 아래에 위치한 노란 눈동자가 보였다. 노란색. 언제부터 그의 왼쪽 눈동자가 금빛이 되었지? 그가 자신의 능력을 개화하면서부터였나. 언제부터 아카싯치가 아카싯치가 아닌게 된 걸까. 내가 알던 그는 어디에 있는 걸까. 저 안에 잠들어 있는 건가. 아니면 포악한 그가 잡아먹은 걸까.

 

"내가 말했잖아, 료타. 나 이외에는 다른 녀석들과 얘기하지 말라고. 그런데 너는 이렇게 어겼으니 어떻게 해야할까."

 

 느릿느릿한 어조로 말한 아카싯치는 끝에 싱긋 웃었다. 그 말에 대한 대답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용서를 빌어야 한다. 잘못했다고, 용서해달라고, 다시는 절대 그러지 않겠다고. 왜 그래야하는지는 모른다. 그저 그가 원해서일 뿐이다. 나는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른채 용서를 빌었다.

 

"죄송함다. 용서해주세여, 아카싯치."

 

"으음, 하지만 용서해주면 또 료타가 어길텐데."


 재밌다는 듯 웃음이 떠나지 않는 그의 입가를 보던 나는 그의 신발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눈이 가늘어지는 게 보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하하, 영악한걸, 료타. 응, 그래야지. 주인에게는 복종해야하는걸 잘 알고 있구나."


 만족스러움에 그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까지 피냄새가 진동해 울컥 속의 것들이 올라올 뻔했다. 내 꼴을 본 아카싯치가 쇼파 뒤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 고개짓을 하자 시체로 변한 사람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피냄새의 근원이 사라지자 그나마 나아진 공기에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긴장을 늦추면 안 되었다. 침을 꿀꺽 삼킨 뒤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를 만족시키기 위해 내가 뭘 하면 좋을까. 그에게 내쳐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아카싯치?"


 아무런 반응을 주지 않자 안달난 내가 그를 부르자 아카싯치가 싱긋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물기 가득한 내 눈동자를 본 그가 곰곰히 생각하는듯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무언가 생각난 듯 손뼉을 친 그는 재미난 것을 찾았다는 듯 경쾌한 어조로 말했다.


"역시 벌을 줘야 료타가 말을 잘 들을 것 같단 말이지."


"잘, 잘못했슴다, 아카싯치."


 좀 전의 참극을 떠오르자 몸이 절로 떨렸다. 나도 그 꼴이 되는 건가. 두려움에 턱을 바르르 떨며 그를 올려다 보자 여전히 차가운 그의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생각을 읽은 듯 후후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료타를 그것들처럼 만들 것 같아? 그렇게 생각했다면 섭섭한걸. 으음, 뭐가 좋을까."


 신중하게 생각하는 척하던 그는 이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근처에 놓여진 물이 담긴 유리잔을 손에 들었다. 뭐지, 하는 순간 머리에서 차가운 게 후두둑 떨어졌다. 물? 의아함에 그를 보자 아카싯치는 여태까지 본 것 중 가장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젖었잖아, 료타. 그럼 벗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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