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바스/녹고]만약

쿠로바스 | 2015. 3. 1. 12:19
Posted by 물빛녘

※미도타카 

 

[쿠로바스/녹고]만약

written by. 티토



 비가 올 것 같은데. 타카오는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하늘은 푸른빛을 잃어버린 잿빛을 띄고 있었다. 구름도 잔뜩. 으음, 비 맞기 전에 얼른 집으로 가야겠는걸. 양손에 들린 비닐봉지를 흘깃 본 뒤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아, 제발 집에 들어가기 전까지 비가 내리지 않기를. 마음같아서는 달려가고 싶었지만 무거운 비닐봉지를 양손에 들고 뛸 체력이 없었다. 역시 고등학생 때가 절정기였던건가.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짓던 타카오는 히죽 웃었다. 절정기가 자시고 간에 올해도 함께입니다! 짐을 고쳐 들었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연인의 손을 빌릴까 생각도 해봤지만 일을 방해할 수는 없지. 암암, 그렇고 말고.


 그러고보면 첫만남은 정말 구렸는데. 타카오는 그 때가 생각나자 인상을 찌푸렸다. 된통 깨졌었지. 그랬던 녀석을 같은 고등학교에서 만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고. 냉정한 듯 보이지만 의외로 속이 따뜻했지. 아, 물론 지금도. 정말 신쨩은 츤데레인게 분명해. 그래도 그런 신쨩이 좋아. 미도리마를 머릿속에 그리며 히죽 웃던 타카오는 이내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좋다고 해도 남자와 남자 간인데, 그걸로 되는 걸까.


 이 사회는 사랑하니까 함께 해주세요, 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녹록하지만은 않다. 사회인이 된 이상 돈도 벌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야 한다. 이 사회의 군중들 사이에서 고립된다는 것은 자살 행위다. 싫든 좋든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며 그 사람들이 다 남자와 남자의 사랑을 축하해주리는 기대할 수 없다. 그리고 신쨩도 사실 가정을 꾸리고 토끼같은 자식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살고 싶진 않을까. 괜스레 드는 생각에 타카오는 머리를 내저었다. 함께 있으면 좋아. 신쨩도 그렇게 말했잖아? 그래, 그거면 된 거야.


 애써 자기위로를 하며 인도 위를 걷고 있을 때,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뭐지, 하며 사람들의 시선을 쫓으니 도로 위에는 피투성이가 된 여성이 있었다. 여성의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운전자 또한 시야에 들어왔다. 교통사고? 타카오는 멍하니 그 관경을 바라보았다. 여자는 멍하니 도로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이 흔들린다. 군중 무리 속에서 어떤 남자가 허겁지겁 현장을 향해 뛰어나갔다. 여자의 몸을 부둥켜 안으며 울부짖었다. 남자친구인가 봐. 쯧, 쯧, 어째? 안 됐네. 사람들이 수근거리는 소리가 멍하게 서 있는 타카오의 귀로 들어왔다. 정말?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그러면서도 폰을 꺼내드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누군가 불렀는지 구급차와 경찰차가 달려왔다. 여자가 구급차에 실리는 것과 마지막으로 남자가 따라 타는 것을 볼 때까지 타카오는 그 자리에서 꼼짝할 수 없었다.


*


 어떻게 집에 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현관문 앞에 서서 애써 평온을 가장하며 문을 열었다. 썰렁한 공기가 피부로 느껴졌다. 정말 신쨩 아침부터 내내 작업중이라고 해도 보일러는 돌리라고. 쓰게 웃으며 거실 불을 켰다. 머릿속에서는 좀 전의 상황이 재생되려 하고 있었다. 올라오려는 속을 진정시키며 부엌으로 걸어갔다. 비닐봉지 속 먹거리들을 꺼내 냉장고에 넣은 뒤 식탁을 짚었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정말 그렇게 한순간에……. 더는 생각하지 말자. 그 여자분도 무사할테고, 나도 괜찮은거야. 응, 그래, 그렇지. 그러니까 평소처럼 웃어야지.


  발을 옮겨 미도리마가 있을 작업실 문 앞에 선 타카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다고 했지만, 아직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신쨩은 의외로 이런데서는 눈치가 빠르다니까. 표정을 가다듬으며 문을 열자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미도리마가 눈에 들어왔다. 진지하게 몰두있는 모습에 타카오는 쭈볏쭈볏 구석에 놓인 매트릭스에 앉았다. 곡 작업에 몰두하는 미도리마의 뒷모습을 감상하기 위해 갖다 둔 매트릭스였다. 물론 여기서 잘 때도 있었지만.


 인기척을 느꼈는지 미도리마가 뒤를 힐끗 바라보았다. 타카오가 히죽 웃으며 앗, 들켰다, 라고 말하자 미도리마가 생각보다 늦었다는 것이다, 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에, 신쨩, 나 보고 싶었어?"


"당연하다는 거다."


 에. 그럴 리가, 라는 말이 나올 것을 예상하고 있던 타카오는 뜻밖의 발언에 얼굴을 붉혔다. 역, 역시 기적의 세대인가?! 직구에 능해! 타카오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미도리마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려 피아노 건반을 눌렀다. 한 손가락으로 건반을 두드리던 미도리마는 이내 왼손 또한 건반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연주를 시작했다.


 처음 들어보는 곡인데, 새로 작업 중인 곡이려나. 타카오는 눈을 감고 연주에 집중했다. 선율은 너무나도 따뜻해서 좀 전의 불안함이 씻겨져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잠시동안의 연주가 끝나고 미도리마가 악보를 손에 쥐었다. 샤프를 움직여 음표를 그려나가던 미도리마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었던 건가."


"응? 아, 아니. 딱히 없었어."


 매트릭스를 움켜 잡으며 대답했다. 우와, 놀래라. 히죽 웃었다. 입 주변 근육에 경련이 올 것 같다. 그래서 애써 웃지 않기로 했다. 연인이니까, 숨겨서 좋을 건 없지 않을까. 타카오는 작업에 집중하는 미도리마를 바라보았다. 신쨩, 아까부터 손이 안 움직이는걸.


"있잖아, 신쨩. 만약에 말야. 진짜 만약인데, 내가 먼저 죽으면 날 위해 곡 하나만 써줄래? 그리고 그 뒤에는 나 잊고 살아가 줘."


 타카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미도리마가 쳐다보는 지는 알 수 없었지만 괜스레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았다. 사람 일은 알 수 없고, 사랑한다 해도 결국은 축복받을 수 없다. 언젠가 헤어져야 한다면, 그게 내 죽음이라면 그렇게 해 줄래, 신쨩?


"…너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가, 타카오."

 

"혹시나, 라고 했잖아."

 

"그렇군. 그럼 나는 너에게 단편 소설 한 권을 부탁할까. …60페이지 정도."

 

 이건 또 무슨 소리? 타카오가 눈을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그게."

 

"그리고 나는 네가 죽게 되거든 이 방을 앨범으로 채울 때까진 잊을 생각이 없다는 거다."


 그 말에 타카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엄청 넓어. 아, 위험.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려고 해. 타카오는 자꾸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간신히 제 위치로 고정시키며 짐짓 삐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여느때보다도 진지한 표정으로 미도리마가 타카오를 응시했다.

 

"에, 그게 뭐야. 신쨩, 이 방 무지 넓다고? …그럼 난 장편소설 낼 거야. 이 방 꽉 채우고 거실까지 채울 정도로 긴 시리즈물로!"

 

 그 말에 미도리마가 피식 웃었다. 뭐가 그렇게 웃겨, 신쨩?! 난 신쨩처럼 말했을 뿐이라고! 타카오가 입을 삐죽이며 미도리마를 흘겨 보자 미도리마가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즈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내가 널 두고 먼저 죽을 일은 없다는 거다."



 

블로그 이미지

물빛녘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67)
공지 (0)
겁쟁이 페달 (0)
다이아몬드 에이스 (1)
오오후리 (0)
쿠로바스 (33)
하이큐 (32)
Free!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