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큐/카게히나]다시 만나자

하이큐 | 2015. 3. 1. 00:14
Posted by 물빛녘

※진단메이커 돌림-

카게히나의 소재 멘트는 '닿아버리면 데인듯 아려와요', 키워드는 촛불이야. 서늘한 느낌으로 연성해


[하이큐/카게히나]다시 만나자

written by. 티토


네게 닿인 부분은 언제나 화상을 입은 듯 아려왔다. 그 부분이 어딘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보다 확연하게 높은 너의 체온은 눈을 감고있어도 네가 내 곁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줬다. 그랬었다. 분명 그랬었다. 이제는 더이상 네 체온은 나보다도…….


너를 처음 봤던 건 학교에서 단체로 등산을 하러 갔다가 나만 일행들과 떨어졌을 때였다. 전화를 위해 핸드폰을 꺼냈을 때, 실망을 감추지 않을 수가 없었다. 통화권 이탈, 선명한 문구가 화면의 중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전파도 닿지 않는 곳이 존재한다는 게 놀라웠다. 어두컴컴한 산중턱, 정처없이 길을 헤매던 나에게 검은 털을 가진 늑대가 다가왔다. 그래, 그게 너였다.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털에 헤에-하며 두려움도 모른 채 너를 바라보았다. 남색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본 너는 머리를 내젓더니 몸을 틀었다. 몇발자국 걸어가던 네가 뒤를 돌아봤다. 따라오라는 걸까. 험한 길로 조심스레 발을 내딛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는 모르겠다. 핸드폰의 플래시로 앞을 밝혀가며 너의 뒤를 따랐다. 이내 네가 멈춘 곳은 낡은 오두막집의 앞이었다. 들어가도 되려나. 아침이 될 때까지 있어도 되려나.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 너를 바라보았다. 계단의 앞에 자리잡고 앉았던 네가 나를 바라보았다. 에헤.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이니 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큰일났다. 내가 뭔가 잘못이라도 했나? 아니, 그건 모르겠는데. 애초에 늑대가 사람에게 우호적이였나? 온갖 생각들이 머리를 어지럽힐 때, 내 어깨에 온기가 느껴졌다. …어라? 다른 사람들보다 확연하게 높은 체온이었다.


내 어깨에 손을 올린 것은 흑발의 남성이었다. 키도 크고, 눈매는 뭐…, 조금 날카로워 보이는 남자였다. 닮은 건 검다, 라는 것뿐이였지만,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이 모습 또한 너라고. 바보냐, 라고 중얼거린 너는 내게서 손을 떼며 계단 위를 올라갔다. 문을 연 너는 나를 돌아보았다. 거기 계속 있을 거냐. 날이 선 목소리에 입을 삐죽이며 갈 거 거든, 이라고 답해버렸다. 길을 잃어버리지 않나, 늑대를 만나질 않나, 늑대가 사람으로 변하질 않나. 분명 평소의 자신이라면 두려워했음직함도 한데, 그 때는 공포감 따윈 없었다. 그래, 네가 나를 해치질 않으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 믿음대로 너는 내게 해를 입히지 않았다. 안전한 장소를 제공해줬을 뿐이다.


다음날이 되었다. 너는 나를 흘겨보더니 터벅터벅 어디론가로 걸어갔다. 어제와 같이 따라오라는 듯한 행동에 네 뒤를 따라가니 등산로가 나왔다. 이 길을 주욱 따라 내려가면 될 거야. 아래를 가리키며 말한 너는 나를 빤히 응시했다.


무섭지 않냐. 네가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글쎄. 그 때의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무섭지 않아. 내 대답에 너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던 너는 다시금 나를 보며 재차 질문했다. 무섭지 않냐.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좀 전의 목소리와는 확연히 다른 목소리였다. 무언가를 경계하는 듯한 날이 선 목소리에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인지 너는 내 어깨를 세게 붙잡았다. 매서운 눈동자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본 너는 다시금 물었다. 정말로 무섭지 않냐. 얼떨결에 고개를 저었다. 그제야 질문을 그만둔 너는 어깨를 잡은 손에서 힘을 풀었다. 눈동자를 굴리며 주변을 살핀 너는 손을 내려두며 뒤로 한발자국 물러섰다.


고마워. 근데 너 이름이 뭐야? 웃으며 묻자 너는 짧게 카게야마 토비오, 라고 답했다. 카게야마, 카게야마구나……. 네 이름을 나는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이상하게도 귀에 익은 이름이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은 그런 이름에 나도 모르게 계속 웃음이 나왔다. 난 히나타! 히나타 쇼요. 웃음을 참으며 말한 내 이름에 너는 입술을 달싹하다 이내 꾹 다물어버렸다. 어라, 기분을 나쁘게 했던 건가. 너는 내게서 등을 돌렸다. 몇발자국을 옮긴 너는 뒤를 살짝 돌아보았다. 그리고선 말했다. 빨리 여기서 나가. 점점 멀어지는 네 뒷모습에다 대고 외쳤다.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네 대답은 어땠더라. 아아, 그래. 너는 분명 이렇게 말했었지. 다시 만날 일은 없길 바란다, 고. 그 때의 너는 이미 알고 있었구나. 우린 만나선 안 될 사이였다는 사실을. 결국엔 이런 결말을 맞이하게 되리라는 것을.


쉴새없이 눈물이 흘렀다. 축 늘어진 네 몸을 끌어안았다. 등을 받친 내 손에서 붉은 액체가 떨어졌다. 지혈할 게 필요해. 너를 조심스레 내려놓기 위해 움직인 순간 식은땀을 계속해서 흘리던 네가 눈을 뜨며 나를 응시했다.


"소용없어, 멍청아."


"…지금같은 상황에서 멍청이는 너거든?"


"됐고, 넌 여기서 나갈 준비나 해."


내가 죽으면 그것들이 몰려올테니까.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은 너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후 너는 눈을 도로 감았다. 입을 달싹이며 무언가를 중얼거리던 너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내게 말을 걸었다.


"…히나타, 너, 우리 둘이 만났을 때 기억 나냐?"


"나 길 잃어버렸을 때?"


"아니, 두번째로."


두번째? 미간을 찌푸리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우리가 만난 건 한두번이 아니잖아.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처음 만난 그 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만나게 되었던 적이 있었다. 아, 그래. 머릿속에 선명하게 강한 인상을 남겼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 날은 그저 마트에 생필품을 사러 가고 있었다. 평소에 늘 다니던 길이었던 터라 길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쉽사리 믿을 수가 없었다. 여긴 대체 어딜까. 황급히 눈동자를 굴렸다. 어렴풋이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여기에 와 본 적이 있어. 머리로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일단 움직이기라도 해야할까 싶어 조심스레 발을 한발자국 한발자국 내딛었다. 무서웠던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익숙하면서도 이건 아닌 듯한 미묘한 느낌에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여긴 어디지. 몇년동안 이 동네에 살면서 자신도 모르는 곳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나름 동네지리에 빠삭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수많은 시선들이 느껴졌다. 사람인가. 아니, 아니다. 이건 뭔가 이상했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듯한, 평소에 느꼈던 시선들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기운을 풀풀 풍기고 있었다. 자신이 움직이든지 달려가든지 해봐도 시선들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소름이 돋았다. 무서웠다. 그러면서도 이곳이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고 있는 자신이 무서웠다. 나가야 해. 아니, 여기 있어야 해.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네가 있을 곳은 어디야, 쇼요? 넌 여기 있어야 한다고 생각이 들지 않니? 귓가에 달콤한 유혹의 말이 들려왔다. 아니, 난 여기 있으면 안 돼. 내가 있을 곳은 이런 곳이 아냐. 정말로 그래? 이곳은 널 필요로 하고 있는 공간이야. 너를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 오직 너만을 원하는 곳이라고. 평소에 불안하지 않았어? 네가 없어도 저 세계는 돌아가지. 그래, 네가 없어도 말야. 그런데 말야, 여긴 널 필요로 한다고. 네가 이 세계의 주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좋지 않니?


시끄러운 게 달라붙었군. 온갖 시선들과 이상한 마력을 지닌 말에 혼란스러워질 때 즈음 네가 나타났었다. 며칠 전 헤어졌을 때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차분한 흑발과 날이 선 눈빛은 여전했다. 너는 나를 보더니 눈을 크게 뜨며 놀란 빛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도 찰나였다. 언제 놀랐냐는듯 내 옆에 있는 사람을 노려봤다. 그제야 나는 내 옆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 사람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눈동자를 옆으로 굴렸다. 그 때,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검은 실들이 엉켜 있었는데 언뜻 보면 사람처럼 보일 듯할 실루엣이었다. 마치 부정한 것들이 뭉쳐있는 것같은…….


"…실뭉치?"


"뭐?"


머릿속에 떠오른 것을 입밖으로 내뱉었는지 내 무릎 위에 누워있던 네가 나를 황당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아, 아무것도 아냐. 그것보다 상처는 어때?"


"…내 상처는 신경쓰지 말고 나갈 준비나 해. 너 나갈 수 있게 할테니까."


"그, 그렇지만 내가 가면 너, 너… 죽는 거야?"


짐작하고 있었으면서도 그게 피부에 와닿자 두려움이 앞섰다. 진짜로 죽는 거야? 좀 전에 죽는다, 라고 했을 때, 그래도 너라면, 이라는 생각이 은연중에 있었다. 아무리 심하게 다쳤더라도 금방 치료되고 그랬던 너였다. 그랬던 네가 어째서 죽음을 암시하는 듯한 말을 하는 걸까. 언제나처럼 이 정도 상처쯤이야, 라고 해도 되잖아.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런 상황을 가져온 게 누군데. 나잖아. 내가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네가 다칠 일도 없었을텐데. 이렇게 된 것도 다 내 탓이잖아.


"히나타, 이 멍청아. 너, 지금 자책하고 있지?"


"……야, 씨. 너 자꾸 나보고 멍청하다고 할래?!"


"멍청이 보고 멍청이라 하지, 뭐라 하냐."


너랑 말을 말아야지. 입을 삐죽 내밀고 있으니 네가 숨을 짧게 들이마쉰 뒤 말했다.


"니가 여기에 오게 된 것도, 그 놈들이 널 노리는 것도 네 탓이 아냐. 니가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고."


"그렇다고 해도……"


반박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런 생각이 드는 걸. 네가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너도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한다는 것도 우습긴 하지만.


"…카게야마는 '떠돌이'지?"


새삼 무슨 소릴 하냐는 듯 네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떠돌이. 정확한 명칭을 붙일 수 없는 그들에게 붙여진 별명. 언젠가 네가 말했던 것들이 떠올랐다. 내가 사는 세상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공간에서 존재하는 그들은 가끔 그곳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잡아먹거나 자신과 같은 존재로 만든다. 먹을 필요없는 그들이 사람을 먹거나 굳이 자신들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이유는 너조차도 모른다고 했었다. 간혹 가다 자신과 같은 이형의 존재가 생겨난다고 네가 쓰게 웃으며 말했었지. 처음 만났을 때, 나를 되돌려보내려 한 것도 이 세계에서 벗어나도록 돕기 위해서였고, 두번째 만났을 때도 너는 나를 돌려보내려 했다. 비록 그 때 처치한 떠돌이 말고도 다른 떠돌이들이 있어서 내 존재는 이 세계에 명확하게 각인된 듯 싶었지만. 세번째도, 네번째도 물론, 그 이후로도 너는 나를 돌려보내려 했었다. 너를 만나고 싶었지만 그러면 안 되는 걸 네게 들었던 터라 조심을 했음에도 나는 계속해서 이곳으로 돌아왔다. 횟수가 10번을 넘었을 때, 결국엔 포기를 하고 너는 내가 이곳에 있을 동안 안전하도록 옆에 있어줬었지.


오늘도 그랬다. 학교에 가다가 이곳에 들어온 나는 여태껏 쌓아뒀던 경험들을 떠올리며 우선 초를 꺼냈다. 불이 있으면 그나마 안전한 결계를 칠 수 있다고 네가 말하며 초라도 들고 다니라고 한 이후로 가방에 여러개 넣어두는 게 습관이 되었다. 붙어라, 붙어라. 조용히 중얼거리자 불이 켜졌다. 여긴 환상이면서도 현실인 공간이기에 이정도는 간단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자, 그럼 너를 찾아봐야지.


그렇게 생각했던 게 화근이었다. 너를 찾았지만 너는 나를 추격하던 무리들과 싸우고 있었다. 갑자기 그곳에 내가 끼어들었고, 당황한 너는 나를 지키려다…….


다행이도 근처에 네가 만들어뒀던 오두막집이 있었다. 너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을 때, 자동으로 결계가 펼쳐졌다. 지금도 평소만큼은 아니지만 결계는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으면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 좀 전에 네가 중얼거렸던 말이 결계를 덧붙이는 주문이었음을 모르진 않았다. 네가 사라진다면 나는 너를 버리고 떠나야하는 걸까. 나중에 다시 이곳에 들어오면 이제 어쩌나, 하는 걱정보단 너를 버리고 가야 하는 상황에 대한 원망이 더 컸다. 차라리 나도 여기에 남는다면? 하지만 그건 네 노력을 수포로 만드는 거잖아.


똑, 똑, 똑.


정중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온몸의 털이 쭈볏 서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 있니, 쇼요? 다정한 말투였지만 간간히 섞여들어오는 음침한 웃음소리에 숨을 헉, 하고 들이마셨다. 그러자 네가 내 손을 잡아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그렇게 말하듯 바라봐주었다. …뭐가 괜찮다는 거야. 나보다도 높은 체온을 가졌던 너의 손은 나보다도 차가웠다. 너와 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는 듯 했다.


똑, 똑, 똑똑똑똑똑.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거세졌다. 이제 도망갈 곳은 없단다. 자, 어서 나오렴, 아가. 어서 빨리.


나와, 나와나와나와나와. 다정한 목소리 대신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간신히 심호흡을 한 뒤 네가 잡은 손이 아닌 반대손으로 옆에 놓아뒀던 가방 안을 뒤졌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커터칼을 꺼냈다. 네 눈이 커지는 것이 보였다.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커터칼로 너와 잡고 있는 손을 몇번이고 긋고, 배를 몇번이고 찔렀다. 더 이상 도망치는 것도, 너를 힘들게 하는 것도 싫어. 차라리 너와 같이 갈래. 응, 카게야마? 제발 그렇게 할 수 있게 해줄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어쩔 수 없네. 너는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내 손을 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조그만 승락의 표시에 고마워, 라고 중얼거렸다. 허락해줘서 고마워. 너와 함께 있을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


다음 생에서 다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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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큐/아카히나]

하이큐 | 2015. 2. 22. 18:36
Posted by 물빛녘

※아카아시 케이지x히나타 쇼요



[하이큐/아카히나]
written by. 티토

정말 모르겠다. 아카아시는 코트 위에서 뛰고 있는 히나타를 응시했다. 알게 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도 자신의 시선은 계속해서 그를 향했다. 해맑은 미소를 만면에 띄운 채 코트 위를 누비는 모습에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아니, 알면서도 모르는 척 자신의 감정에서 눈을 돌리고 있었다. 상대만 보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당장이라도 품에 안고 싶은 건 좋아한다라는 의미임을 모르진 않았다. 처음 좋아하게 된사람이 남자라는 사실보단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런 감정이 들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첫 눈에 반한다, 라. 예전이라면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좋아한다, 라는 감정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인지 이해 못했을 감정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카아시는 짧게 숨을 들이마신 뒤 물통을 집어 들었다.


"대단하네……."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뒤 왠지 모를 갈증에 스포츠음료를 꿀꺽 꿀꺽 마셨다. 마셔도 마셔도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아, 답답해. 고개를 숙여 체육관 바닥을 응시했다. 다다닥 뛰어가는 소리 뒤에 강한 타격음이 들렸다. 옆에서 감탄 소리도 들렸다. 대단하네, 저 녀석. 팀동료들의 멍한 목소리와 함께 기뻐하는 듯한 히나타의 외침에 보지 않아도 그 두 사람이 속공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자신에게 그에게 맞는 공을 보내라고 해도 저기 카라스노의 천재 세터처럼 잘 보낼 자신은 없었다. 그만큼 카게야마의 기술은 정교했고 어느 누구도 쉽사리 흉내낼 수 없을 기술이였다. 아아, 자신에게 재능이 있었더라면, 히나타와 같은 학교였더라면 히나타와 함께 저 코트 위에 설 수 있었을까. 실없는 생각에 아카아시는 힘없이 픽 웃았다. 그런 건 상상일 뿐이다. 결코 현실이 될 수 없는 헛된 망상에 빠져있어봤자 좋은 건 없었다. 현실을 직시하자.


"저…, 아카아시상?"


연습을 끝나고 왁자지껄 밥을 먹고 난 뒤 조심스레 히나타가 다가왔다. 무슨 일인 거지. 눈을 깜빡이며 히나타를 바라보자 히나타가 배구공을 내밀면서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스파이크 연습 도와주세요!"


"…카라스노에도 세터 있잖아? 네코마의 코즈메도 있고."


그러자 히나타의 얼굴이 불만에 찬 얼굴로 바뀌었다. 자신이 무언가 실수라도 한 걸까. 분명 카라스노에도 세터는 두 명이 있었다. 천재 세터 카게야마와 부주장인 팀원들의 정신적 지주 스가와라상. 그리고 히나타는네코마의 세터 코즈메와 친해보였으니 자신이 아니더라도 부탁할 사람은 많았다.


"카게야마는 아사히상이랑 맞춰본다고 가버렸고, 스가상은 사와무라상이랑 대화 중이시고, 켄마는 사라졌어요."


"뭐, 상관없긴 하지만……."


"왓! 감사합니다! 공은 야치상이 던져준다고 했어요."


환한 미소를 지으며 히나타가 말했다. 아카아시의 눈에 저만치서 쫑쫑쫑 뛰어오는 단발머리의 여학생이 보이기 시작했다. 같은 1학년이라고 했던가. 히나타의 옆에 서서 숨을 고른 야치는 살짝 웃어보이며 히나타에게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건넸다. 이내 고개를 돌려 아카아시에게 기합이 팍 들어간 듯한 인사를 건넸다. …기합이라기보단 잔뜩 긴장한 듯 보였다고 하는 게 맞으려나. 흘긋 야치를 바라보다 가자, 라는 짧은 말을 내뱉으며 몸을 틀어 체육관으로 향했다. 저벅저벅 뒤에서 걸어오는 소리와 함께 이야기소리가 들렸다. 도란도란 대화 소리에 간간히 웃음소리가 섞여있었다.


같은 학교에, 같은 학년. 친하겠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질투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나. 쓴웃음이 절로 지어졌다. 이렇게 질투한다고 해도, 히나타와 자신은 아무 관계도 아닌데 뭔 소용이야.


체육관으로 들어섰다. 더운 밖보다는 확연히 서늘한 공기가 피부로 와닿았다. 간단한 스트레칭 후 코트 위에 섰다. 옆을 흘깃 보니 스트레

칭을 하고 있는 히나타가 보였다. 히나타의 흰살결 위로 더위로 인한 땀이 흘러내렸다.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소리가 느껴졌다. 얼굴도 벌개져있을지도 모른다. 순간적으로 충동에 휩싸일 뻔한 아카아시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대로 가다간 어떤 실수를 할 지 감도 안 잡혔다. 이 정도라면 괜찮겠지, 라고 생각해서 승낙했던 것인데 정말 괜찮기는 할런지.


길게 숨을 들이내쉬며 야치가 공중에 던진 공을 응시했다. 위로 팔을 뻗어 토스할 자세를 취했다. 공이 자신의 손으로 내려오자 간단한 반동을 주듯 받아서 히나타에게로 보냈다. 타앙- 경쾌한 소리와 함께 공이 반대편 코트로 떨어졌다. 


흘깃 히나타를 돌아보니 뚫어져라 손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카게야마의 토스와 너무 달라서 그런걸까. 잠시 뒤 히나타가 해맑은 목소리로 외쳤다.


"아카아시 상, 토스 기분 좋아요!"


공이 팍-하고 왔어요! 두 손을 주먹쥔 채 휘두르며 말을 덧붙인 히나타는 의욕 넘치는 얼굴로 다시 자세를 잡았다. 아, 위험해. 동작 하나하나에 심장이 떨렸다. 자칫하다간 이성을 잃고 애써 숨겨두고 있는 마음을 토로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미치자 고개를 내저었다. 정신차리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공을 들고 서있는 야치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 번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왔다. 짧게 숨을 내뱉으며 토스. 이내 또다시 경쾌한 소리가 들려왔다. 


몇번동안 이 동작을 반복했을까 체육관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섰다. 숨을 고르던 히나타가 '어, 야마구치!'라고 외쳤다. 아카아시는 고개를 돌려 야마구치를 바라보았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히나타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건넨 야마구치가 고개를 돌려 야치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레 자신에게 향한 시선에 야치가 고개를 갸웃하며 눈을 깜빡였다.


"야치 상, 시미즈 선배가 찾으셔."


"엑, 무, 무슨 일로?"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그럼 가 봐야겠네. …아, 저 금방 돌아올게요!"


아카아시는 야마구치의 뒤를 따라 종종걸음으로 사라진 야치를 멍하니 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터벅터벅 걸어가 벽에 기대어 앉았다. 자리에 가만히 서서 눈을 깜빡이던 히나타 또한 아카아시의 옆으로 걸어와 앉았다. 잠깐동안 침묵이 둘 사이에 내려앉았다.


"…하나만 물어봐도 되려나?"


"네?"


"나한테 부탁한 진짜 이유가 뭐야?"


친한 사람이 사정이 있었다고 해도 어째서 나야? 뒷말은 삼키며 히나타를 응시하자 히나타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꽂혔다. 흔들리지 않는 올곧은 눈동자에 황급히 시선을 내리자 바닥을 짚고 있는 히나타의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조심스레 시선을 올렸다. 흔들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눈동자가,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침을 꿀꺽 삼킨 히나타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진다고 생각했을 때 입술에 무언가 말캉한 게 와닿았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히나타의 얼굴이 멀어지고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얼굴로 피가 몰리는 기분이 들었다.


히나타는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저, 저도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카아시 상이 좋아졌다고나 할까……, 신경 쓰인다고나 할까……."


풋-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버렸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사과같이 붉어진 얼굴로 오물오물 말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귀여울 지경이었다니. 이걸 보고 콩깍지가 씌였다고 하나.


손을 뻗어 히나타의 볼에 얹었다. 그리고선 입을 맞췄다. 가까워진 히나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내 히나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카아시는 조심스레 히나타의 치열을 혀로 쓸었다. 작게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혀가 서로 얽히고, 타액을 교환하고, 결국 입을 뗐을 때 둘 사이에 가느다란, 누구의 타액인지도 모를 흰 선이 놓여졌다. 그것을 본 히나타의 얼굴이 더이상 붉어질 수 없을 거라 생각할 정도로 익어버렸다. 다시 한 번 살짝 입을 맞춘 뒤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도 히나타 군이랑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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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큐/스가카게]그란 존재

하이큐 | 2015. 2. 9. 11:34
Posted by 물빛녘

※스가카게 데이 합작(http://lol.ncity.net/29/xpxh.php)에 낸 글입니다.

※2/9 스가카게 데이.



[하이큐/스가카게]그란 존재

writtern by. 티토


정말이지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특별히 뛰어난 것도 없는 내가 이 배구부에 들어와서 주전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희망은 거의 없었다. 비록 추락한 강호라는 별명이 붙어있긴 해도 나름대로 강한 팀이었다. 이런 내가 주전이 된다는 것은 아무래도 인원부족에서이지 않을까, 라고 입부한 이래로 계속 생각해왔다. 갈수록 줄어드는 인원 때문에 자신이 주전에 발탁된다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한 일이다. 뭐, 나에게 있어서는 배구할 수 있는 게 중요하지 주전이 되고 아니고는 중요하지 않다. 애초에 기대는 버린 지 오래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후배로 천재가 들어온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태연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노력하면 보상이 잇달아 온다는 것은 질리게도 들은 말이었지만, 실상 그런가 하고 뚜껑을 열어보면 그런 것만도 아니다. 압도적인 재능의 차이. 그것은 사람을 쉽게 좌절시키게끔 만든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렇게 연습에 매달리는 걸까. 따라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나는 왜 열심인 걸까. 어째서? 무슨 이유로? 글쎄, 그건 자신도 잘 모르겠다. 조금이라도 그에게 가까워지고 싶어서, 이려나.

 

아아, 카게야마, 그란 존재는 정말 내게 있어 엄청난 벽과도 같았다. 재능의 얘기뿐 아니라 성실함에 있어서까지도. 아침저녁으로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는 그는 참 대단하게 보였다. 그런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는 어떻게 그 정도로 성실할 수 있을까. 배구를 좋아해서? 나는, 나는… 그처럼 배구를 순수하게 좋아하지 않는 걸까.

 

방금 전 그에게로부터 수줍은 고백을 받았다. 좋아합니다. 수식어 하나 없는 담백한 고백과 함께 그는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카게야마의 좋아한다, 라는 감정이 자신의 감정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말하면 상처 받지 않을까, 라고 말을 고르고 고르려 해도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진심으로 거절하고 싶다 생각한 걸까. 아니면 몰랐던 감정을 지금에서야 자각한 걸까. 힘들게 대답하실 필요 없다며 등을 돌려 체육관으로 돌아가는 카게야마의 뒷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멀다. 잡히면 바로 잡힐 거리에 있었던 그는 어느 사이엔가 멀어져 잡히지 않게 되었다. 아아, 나는 대체 뭘 하고 싶었던 걸까.

 

잡아서, 뭘 어쩌려고? 무슨 말을 하려고? 대답을 하려 했던 건가. 머릿속은 백지가 되어버렸으면서도? 대책 없는 자신의 행동에 쓴 웃음이 절로 나온다. 나는 도대체 카게야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무릎을 굽혀 어쩡쩡한 자세로 앉으며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모르겠어. 정말로.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처음 그의 경기를 봤을 때, 엄청난 재능이구나, 하고 감탄했다. 그리고 내심 부러웠고 무서웠다. 만약 대회에서 맞붙게 된다면……. 그 후에 든 생각은 안타까움. 고독하게 혼자 코트에 서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코트에는 너 혼자만 있는 게 아니야, 조금은 팀원들을 믿어도 괜찮아, 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리고 또 무슨 생각이 들었더라.

 

―뭔가 뭉그르르하면서도 간질간질한 기분이었던 것 같은데.

 

잠시 고민하다 체육관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머리가 지끈거렸다. 분명 자신은 배구를 좋아했고 잠시나마 주전 자리에 있었다. 능력의 부족이었음을 알고 있었고 기대는 버린 지 오래였기에 큰 상심은 하지 않았다. 단지, 연습을 더 늘렸을 뿐이다. 그렇다면 카게야마를 향한 감정을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 자신은 확실히 카게야마를 좋아한다. 그렇지만 그게 그와 같은 연애감정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안아주고 싶다, 라는 생각은 종종 했었지만. 어라, 그게 연애감정인 건가.

 

체육관 안으로 들어서니 어느새 배구에 열중인 카게야마가 시야에 들어왔다. 배구하는 카게야마는 좋아한다. 재능이 어떻다니, 해도 배구에 푹 빠져 있는 모습을 보면 대견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좀 더 이쪽을 봐줬으면 좋겠기도 하고.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아, 그렇구나, 이게 그런 감정이구나. 하하, 웃음이 나왔다. 자신은 그의 재능을 좋아한다. 팀의 큰 전력이 되는 그를 좋아한다. 고기만두를 한입 베어 물어 오물거리고 있는 그를 좋아한다. 입을 삐죽거리는 그를 좋아한다. 또래남학생 같은 모습을 좋아한다. 그의 모든 것을 자신은 좋아하고 있었다.

 

―아아, 그란 존재는 자신의 마음속에 이미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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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큐/이와카게]약속

하이큐 | 2014. 12. 22. 00:10
Posted by 물빛녘

※카게야마 토비오 생일 기념 합작(http://lol.ncity.net/birthday/)에 낸 글입니다.

※카게야마 생일(12/22)기념 글


[하이큐/이와카게]약속

written by. 티토



크리스마스까지 열흘, 연인의 생일까지 일주일. 생일로부터 3일 뒤가 크리스마스. 매년 곤란하다니까. 이와이즈미는 미간을 찌푸리며 달력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생일 선물과 크리스마스 기념 선물은 역시 따로 주는 게 좋을까. 아니, 겸해서 한 번에 준다 해도 신경 쓸 인물은 아니지만. 선물은 또 뭘 준비해야하지. 이맘때가 되면 이 문제로 머리가 아파온다. 음식보단 좀 더 기억에 남을 수 있는 걸로, 오래 간직할 수 있는 걸로 준비하고 싶은데. 컴퓨터로 이것저것 클릭해보다 적당한 게 나오지 않아 그냥 전원을 꺼버렸다. 그대로 침대에 엎어져 휴대폰 자판을 두드렸다. 수신인은 카게야마 토비오. 메일 내용은 22일 저녁 시간 비냐는 물음. 매년 주고받는 메일. 답신은 분명 저녁8시 이후라면 괜찮아요, 이려나.


비슷한 내용의 메일을 하게 된 건 자신이 중학교 3학년 때, 카게야마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분명 사귀기 시작한지 3달 즈음 지났을 무렵이었다. 사귀게 된 계기는 뭐였더라.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부활동 직전에 카게야마가 갑작스레 고백을 해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당시 자신은 좋아하는 마음을 자각하지 못 했을 뿐더러 카게야마가 좋아하는 사람이 오이카와인 줄 알고 있었기에 깜짝 놀랐었다. 대답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카게야마는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은 안 해도 된다고 했었다. 그냥 말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이 마음을 전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말하는 카게야마의 표정이 마치 마음을 접은 것만 같아 괜스레 조바심이 났었다. 그 때는 그 이유를 몰랐지만, 지금은 그게 좋아했기 때문에 엇갈렸을까 걱정했던 자신의 진심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휴대폰이 진동소리를 내며 메일이 왔음을 알렸다. 화면을 들여다보니 역시나 8시 이후라면 괜찮다는 메일이 와 있었다. 이전에는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그 이후. 우선순위가 뒤라고 해서 굳이 섭섭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카게야마와 카게야마의 부모님 관계가 얼마나 돈독한지 알기도 하거니와 연인보다 가족이 더 우선이다.


이번에는 휴대폰이 전화가 왔음을 알렸다. 오이카와였다. 이 녀석이랑도 질긴 인연이지. 어릴 때부터 학교가 같아 자주 어울렸던 옆집 친구 녀석의 전화에 잠시 뜸을 들이다 통화 연결 버튼을 밀었다. 여전히 방방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와쨩, 전화 받는 거 완전 늦어!


“받을까 조금 고민했거든. 무슨 일이냐?”


―너무해! …왠지 이맘 때 즈음이면 토비오쨩 선물 뭐 살까 고민하던 이와쨩이 눈에 선해서 전화했지! 아, 맞아. 이와쨩, 설마 크리스마스랑 같이 챙길 생각은 아니지?! 그런 거 초 상처라고!


“…너 독심술 배웠냐.”


―이와쨩이 매년 고민하는 게 같으니까 그러지. 올해도 고민했지? 매년 따로 주면서 고민하고. 그래서 선물은 고른 거야, 이와쨩?


이와이즈미는 침대에서 일어나 다시 한 번 달력을 유심히 응시했다. 일주일. 빠른 시일 내로 어떤 것을 선물할 지 골라야 여러 곳에서 비교해보고 사는 게 가능해진다. 사는 김에 크리스마스 선물까지 준비해두면 좋을 것 같은데. 매해 다가오는 생일날이 되면 어떤 것을 선물해줘야 할 지 고민이 된다. 아, 뭐 좋은 거 없으려나.


―토비오쨩이 기뻐할 만한 거 없어? 필요할 만한 거라든가. 같은 학과인 치비쨩한테 물어보는 건 어때?


“기뻐할 만한 거라……. 그래서 넌 뭐 선물로 줄 생각인데?”


―나는 배구화 사주려고. 저번에 닳았다는 얘기 들은 거 같아서.


“예전에 이러니저러니 했으면서 지금은 또 잘 지내냐.”


―뭐야, 이와쨩, 질투? 걱정 마, 걱정 마! 토비오쨩은 내 취향 아니거든.


“…안 물어봤어. 끊어.”


통화종료버튼을 눌렀다. 곧바로 ‘너무해, 이와쨩!’이라는 메일이 날라오긴 했지만 간단하게 넘기고 다른 메일들을 훑어보았다. 쿠니미는 옷을 사준다는 것 같고, 킨다이치는 최근 요리에 관심을 보이는 카게야마를 위해 요리책 몇 권을 선물로 줄 예정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자신은 뭘 주는 게 좋지. 좀 전에 오이카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기뻐할 만한 것, 필요할 만한 것. 기뻐한다……라. 재작년 즈음 어떤 걸 받고 싶냐고 넌지시 물어봤을 때는 ‘이와이즈미상의 시간을 주세요.’라고 말했었는데. 그것만으로도 기쁘다고. 그런 말은 기쁘지만 막막하다고. 뭐랄까 그 녀석 은근 부끄러운 말을 서슴없이 한단 말이지.


어쨌든 내일 점심 때 만나기로 했으니 그 때 은근슬쩍 물어볼까.

 


“필요한 거라면……. 아, 공책이 부족한데요.”


대학교에 들어오면서 공부에 열심인 카게야마가 음료를 빨대로 저으며 대답했다. 아, 그런가. 역시 그렇겠지. 지금 분명 생일선물로 뭘 받고 싶은지 물어보는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지도 않겠지. 예상은 했지만.


그래서 이따가 사러가려구요. 담백한 어조로 말을 이은 카게야마는 그건 갑자기 왜 묻냐는 듯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며칠 뒤가 생일이라고는 생각도 안 하는 눈치였다. 서프라이즈를 준비하는 입장이라면 좋은 거겠지만. 그나저나 역시 뭐로 준비해야 한다……?


“아, 이와이즈미상, 혹시 크리스마스에 콘서트 안 가실래요? 히나타한테서 받았는데.”


카게야마가 가방을 뒤적이더니 표 두 장을 꺼냈다. 꽤나 유명연예인의 콘서트였다.


“난 좋은데. …히나타 녀석이 그냥 준 거야?”


“…네.”


잠시 뜸을 들이더니 카게야마가 끄덕였다. 음료를 한모금 마신 카게야마가 말을 꺼냈다.


“저 자취할까 하는데요.”


빨대를 이빨로 잘근잘근 씹던 이와이즈미가 행동을 멈추고 카게야마를 응시했다.


“내년 봄학기 전에 기숙사에서 나올까 하고. 그래서 말인데, 나중에 같이 집 보러 다녀주시면 안 될까요?”


조심스레 말을 꺼낸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취, 인가. 각자 수업이 있기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를 집어넣는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계산은 이미 끝냈고. 가방을 챙겨 자신을 바라보는 카게야마에게 혹시나하는 생각으로 말을 꺼냈다.


“카게야마, 혹시 나한테 받고 싶은 거 있어?”


두어번 가볍게 눈을 깜빡인 카게야마가 대답했다.


“같이 있는 걸로 충분한 걸요.”

 


테이블 위에 케이크를 올려놓았다. 초를 꽂아놓고 초인종이 울리길 기다렸다. 메일내용을 보니 곧 도착할 것 같은데. 얼마 지나지 않아 초인종이 울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문을 열었다. 코가 빨개진 카게야마가 감았던 빨간 목도리를 벗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의자에 앉아 촛불을 켠 뒤 부엌의 불을 끄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뭔가 이 노래 부를 때마다 쑥스럽단 말이지. 카게야마가 촛불을 끄자 스위치를 다시 눌렀다. 부엌이 환해지고 살짝 웃음을 띈 카게야마가 시야에 들어왔다. 준비해뒀던 것을 꺼냈다. 반지 케이스를 내밀었다.


“반지?”


목에 건 체인에 달린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카게야마가 중얼거렸다. 분명 반지이긴 했다. 카게야마가 놀란 부분은 이미 커플링은 맞춰 체인에 걸어둔 상태였다는 것이겠지. 카게야마가 반지 케이스를 열자 반지와 함께 열쇠가 들어있는 것이 시야에 담겼다. 그것에 놀라 열쇠를 꺼낸 카게야마가 자신을 쳐다보자 이와이즈미가 반지를 낀 왼쪽 네 번째 손가락을 보여주며 말했다.


“결혼하자, 카게야마.”


네가 가장 기뻐하는 것은 나와 함께 있을 때. 그렇다면 쭉 함께한다는 약속을 네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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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큐/오이카게]어느 겨울날

하이큐 | 2014. 12. 8. 23:45
Posted by 물빛녘

※겨울합작(http://blog.naver.com/jkt5028s/220204451308)에 낸 글입니다.


[하이큐/오이카게]어느 겨울날

written by. 티토



눈인가. 오이카와는 부엌에 난 작은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꽤 춥겠는걸. 실내스포츠를 한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아, 야외스포츠면 오늘 같은 날은 연습쉬려나. 어찌되었든 나가야하는 시간이 되었으므로 방으로 들어가 옷장 문을 열었다. 두꺼운 외투를 위에 걸치고 우산을 챙겨 현관문을 열었다. 찬바람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 목도리를 단단히 고쳐 두르고 문을 닫았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온통 새하얗게 변한 세상이 눈에 들어왔다. 눈에 발이 파묻혔다. 푹 푹 빠지는 발을 옮겨 체육관으로 걸어갔다.


“오이카와씨, 오셨네요.”


“안녕.”


인사를 하고 체육관 안에 있는 방으로 걸어갔다. 아, 춥다 추워.


자신은 지금 대학 배구팀에서 선수로 뛰고 있었다. 현재 2학년. 이제 곧 3학년으로 올라가겠지. 그렇다면 역시 그 녀석도 만날 수 있게 되려나. 카게야마 토비오. 중학교 때부터 거슬렸던 녀석. 천재. 배구밖에 모르는 순진함. 그리고 자신의 첫사랑. 좋아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건 고3. 확연히 달라진 모습을 보며 내가 몰랐던 그의 모습에 입 안이 쓰게 느껴졌다. 지난날들을 돌이켜 보면 마치 어린아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일부러 짓궂게 굴던 모습과 닮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아, 내가 그 녀석을 좋아했었구나, 하고. 정말이지 한심했었다.


오이카와는 외투를 옷걸이에 걸어두고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었다. 체육관으로 다시 돌아가니 3 대 3으로 연습시합을 하고 있었다. 물을 마시면서 경기를 보고 있던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를 발견하고 퉁명스레 말했다.


“늦잖아.”


“아, 이와쨩, 왔어?”


“그래, 왔다, 너보다 일찍 와서 뛰고 있었거든.”


“난 아까 못 봤는데?”


“있었어.”


“거기 시끄럽게 할 거면 끼어!”


연습시합에서 뛰고 있던 한 명이 외쳤다. 이와이즈미는 손을 내저었다.


“난 패스. 조금 쉴래.”


“이와쨩 안 뛰면 숫자 안 맞는데.”


“넌 몸이나 풀어.”


오이카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발목을 돌렸다. 간단한 스트레칭 후 체육관 안을 돌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이와이즈미의 말이 오이카와의 발목을 붙잡았다.


“카게야마랑은 연락 안 하냐?”


“안 해. 해야 할 이유도 없고.”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부터 그를 피했다. 봄고가 끝난 후였기 때문에 딱히 마주칠 염려는 없었다. 그 뒤에도 그에 대한 소문은 무조건 피했기에 지금 어디로 진학할 생각인지도 몰랐다. 궁금하긴 했지만, 두려움이 더 컸다.


“지금 어떻게 지내는 지 궁금하지도 않냐.”


알아서 잘 지내겠지. 랄까, 이와쨩, 갑자기 토비오쨩 얘기는 왜 꺼내는 건데?”


다시 이와이즈미의 옆에 털썩 앉은 오이카와가 물었다. 한숨을 내쉰 이와이즈미는 짜증난다는 듯이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약간 움찔한 오이카와는 뒷목을 긁적였다.


“넌 그 녀석 부상당한 것도 모르지?”

 

연습을 끝내고 가는 내내 좀 전에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갑작스런 얘기에 머리가 따라가지 않았다. 이와이즈미의 말에 의하자면 몇 달 전 부상을 당했다고 했다. 흔한 드라마나 영화 속의 이야기처럼 일상생활은 가능하지만 선수로는―. 엄청난 재능에 자신이 질투했던 남자의 부상. 이제 시합에서 만날 일은 없어졌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수면 위로 떠오른 감정은 슬픔이었다. 울고 싶어졌다.


집으로 걸어가는 내내 침울함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어째서 이런 감정이 드는 것일까. 그 재능을 질투했었지 않았던가. 답은 지극히도 단순했다. 자신은 그를 사랑했고, 그의 재능 또한 사랑했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재능이었지만, 그래도 사랑했었다. 언젠가 자신을 뛰어넘겠지. 그렇다면 쫓기는 입장에서 쫓아가는 입장이 된다. 그렇다고 해도 좋았다. 그와 함께 시합에 임하는 것이 좋았다. 적이든, 아군이든.

집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장시간 밖에 있어 코가 빨개져 있는 남자였다. 오이카와는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가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오이카와씨, 기다렸어요.”


눈 속에서 서있던 남자는 카게야마 토비오였다.

 


안으로 들어가 황급히 난로를 틀었다. 우산도 안 챙겨 왔는지 눈사람이 된 카게야마의 어깨를 털어주고 부엌으로 가 코코아를 탔다. 카게야마는 현관에서 눈을 턴 뒤 목도리를 풀며 조심스레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오이카와는 컵 두 개를 들고 부엌에서 나와 카게야마에게 하나를 내밀었다. 고개를 꾸벅인 뒤 카게야마가 컵을 받았다. 오이카와와 카게야마는 거실에 있는 코타츠 다리를 집어 넣고 앉았다.


“눈 오는데 거기서 얼마나 서 있던 거야. 카페라도 들어가 있던가.”


“그렇지만 오이카와씨 언제 돌아오실 줄 몰라서.”


“아, 그러니까―.”


연락이라도 하지, 라고 말하려던 오이카와는 입을 다물었다. 연락을 피했던 게 누군데. 의아한 표정으로 카게야마가 바라보자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어쩐 일이야.”


“…저, 저도 모르겠어요.”


농담을 하는 건가 싶어 물끄러미 바라보니 카게야마 자신도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냥 만나고 싶었어요.”


“헤에, 그래? …부상당했다는 얘긴 들었어.”


오늘 들은 거지만. 코코아를 홀짝이던 카게야마가 고개를 들어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눈빛에 오이카와는 시선을 바닥으로 돌렸다.


“들으, 셨나요.”


의문문이 아닌 듯 끝이 내려갔다. 오이카와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번 시합 때.”


“그래서 이젠 어떻게 할 생각이야?”


잔인할 지도 모른다. 카게야마는 물끄러미 코코아를 내려 보더니 말했다.


“저 시험 쳤어요. 오이카와씨 학교에. 확실히 선수로는 뛸 수 없지만, 아예 못 하는 건 아니니까 후에 학교에서 배구부 코칭이나 할까 하고. 역사교사로도 일해보고 싶고.”


“교사?”


“네, 저 대학교에서는 역사 쪽으로 배워 보려구요.”


역사인가. 뭔가 안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의외로 어울릴지도.


“오이카와씨는?”


“…난 대기업에서 콜 들어와서, 아마 그 쪽에서 선수로 뛸 거 같아.”


“아, 그렇군요. …저, 오이카와씨, 만약에 제가 대학 합격하면.”


카게야마가 잠시 말을 멈추고 손을 꼼지락거렸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행동 하나하나 신경 쓰이고, 귀여워 보이는 것을 보면 자신도 참 중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몇년간 어떻게 버텼던 것인지 자신도 신기할 정도였다. 카게야마는 마음을 먹었는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같이 살아도 괜찮을까요?”


얼마나 힘들어했을까. 부상을 당한 뒤 얼마나 울었을까. 무조건 카게야마의 소문이라면 피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요령 없는 자신의 후배는 혼자 끙끙 앓고 있었겠지.


좋아. 얼마든지, 토비오쨩.”


왠지 모르게 그 말을 꺼낸 순간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조금은 자신의 마음에 솔직해진 기분이었다.


어느 겨울날 갑작스레 찾아온 너는 밝은 햇살 마냥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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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큐/킨카게]기억

하이큐 | 2014. 12. 8. 22:22
Posted by 물빛녘

※킨다카게

※해일님 리퀘



[하이큐/킨카게]기억

written by. 티토



시간이 지나면 기억은 퇴색된다. 잊혀지거나 미화되거나. 하지만 간혹 그 사이에서 질기게 살아남는 기억이 있다. 나같은 경우는 카게야마, 너와 관련된 기억들이다. 중학교에 들어와서 너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리가 너에게서 멀어진, 너를 거스른 그 시합까지 네가 얽힌 기억들이라면 거의 온전히 내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너와의 기억에 집착하는 걸까. 나조차도 의문이 들었다. 너는 내게 있어 어떤 존재일까. 중학교 동창생? 독재자? …아니면 조금은 특별한 사람? 어떤 형태로든 너는 내 기억 속에 존재한다.

 

처음 만났던 날은 역시 중학교 부활동 첫 시간에서였다. 선배들 앞에서 주눅들지 않고 또박또박 자기소개를 하는 네가 조금은 신기해보였다. 친해지고 싶다, 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녀석이라면 꽤나 재밌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오이카와상이 있던, 우리들이 아직 1학년이던 그 때에는 쿠니미와 함께 셋이서 잘 어울리곤 했다. 얼빵한 네 반응에 웃는 일도 많았다. …쿠니미 녀석은 조금 귀찮아하던 것 같지만 나는 그래도 이런 일상이 싫지 만은 않았다. 오히려 다음 날이 기다려질만큼 두근거렸다.

 

네가 좀 이상하다고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2학년 때부터였다. 초반에는 괜찮았다. 갈수록 너는 승부에 집착했고, 완벽함에 목을 매달았다. 스파이커들이 세터인 너에게 맞춰주기를 원했다. 그 때까진 그래도 버틸 수 있었다.

 

너의 마치 횡포와 같은 행동들에 버틸 수 없게 된 것은 3학년이 되면서였다. 본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조건 소리를 지르는 너는 적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초반에는 다들 어쩔 수 없이 따르곤 했다. 그것도 초반뿐이었다. 네 요구는 점점 높아졌고, 우리는 지쳐갔다. 그래, 그뿐이다. 그 날 그렇게 된 것도 쌓아왔던 것들이 무너져 그랬다. 너는 그 때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카게야마, 넌 배구하는 거 좋아해?"

 

"응."

 

"왜?"

 

"……그냥 재밌어서."

 

언젠가 물었던 질문에 너는 고개를 끄덕이며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우리가 나갔던 마지막 시합에서 그저 배구가 재밌다던 너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재밌기 때문만이 아닌, 좀 더 완벽함을 추구하는 독재자만 코트 위에 있을 뿐.

 

다음 해, 우리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너는 다른 학교로 진학했고, 나와 쿠니미는 아오바죠사이에 진학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라스노와 연습시합을 가지게 되었다. 역시 너를 만날 수 있었다. 독재자인 네 모습은 여전할 거라 생각했다. 너를 도발하기 위해 내뱉은 말에 너는 태연자약하게 응, 이라고 대답했다. 뭔가 조금 이상했다. 너라면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을 터였다.

 

이상함을 느낀 것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너는 히나타라는 키 작은 미들블로커에게 맞춰주고 있었다. 이건 네가 비교적 온화하던 중학교 1학년 때에도 못 본 모습이었다. 그 때도 너는 자신 위주의 플레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네가 달라져 있었다. 내가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네가 달라졌다는 것을 눈치챈 순간 허탈함이 앞섰다. 3년을 알고 지냈다. 3년동안 팀메이트였다. 그런데 반년도 채 지나지 않은 히나타라는 녀석과 넌 마치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양 호흡이 척척 맞았다. 중학교 때의 카게야마 토비오는 사라지고 없었다.

 

카게야마 토비오, 너란 존재는 내게 있어 친구 이상의 존재였다. 좋아했고, 그만큼 미워하기도 했었다. 좋아했던 마음이 컸기에, 미워하는 마음도 컸다. 미워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너를 좋아했다.

 

내가 알던 네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너와 함께했던 날들은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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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큐/카게히나]Harmony

하이큐 | 2014. 12. 2. 23:12
Posted by 물빛녘

*카라스노 배포전 역2에 나오는 회지 샘플입니다.

[32p/3000원]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카게야마는 물끄러미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째서 였을까. 어째서 팀이 이렇게 해체되어야 했을까. 실적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은 편이었다. 그럼에도 해체되었다. 짐작 가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외면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룹이 해체된 이유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팀워크의 부재임을, 그것도 상당수 자신이 차지하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초반부터 삐걱거렸으니 이때까지 버틴 게 오히려 질기게도 버텼구나, 하고 생각될 정도였다.

주먹을 꽉 쥐었다. 열심히 하는 게 뭐가 나빠. 나는 그저―. 다리에 힘이 풀렸다. 스르르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벽에 기댔다. 재계약 제의를 받지 못한 것은 그룹 내에서 자신이 유일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이지 않나. 자신이 잘못된 것이다. 그래, 그런 거다. 빡빡한 일정 속에서도 멤버들에게 강도 높은 연습을 강요했다. 그뿐일까. 동료들에게 온갖 지적을 퍼부었다. 그것에 지쳤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자신은 그저 아직 부족하다고 느꼈을 뿐이었다. 좀 더 완성도 높은, 좀 더 훌륭한 노래를 부르고 싶었을 뿐이다. 그게 지금의 결과를 초래했다.

착잡함이 절로 들었다. 이제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자신을 받아줄 곳이 과연 있기는 할까. 모르겠다. 지금 이런 생각을 해봤자 무슨 소용일까. 다 끝난 일이다. 이제 와서 바뀌는 건 없었다.

“어둠 속에 혼자 남겨진 것을 느꼈을 때,

슬픔보다 공허함이 앞섰지.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아.

뒤늦게서야 알았지.

나는 언제나 혼자였다는 것을.”

언젠가 썼던 노래가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이렇게 되도록 거의 방치하다시피 한 자신에 대한 분노가 슬픔보다 컸다. 좀 더 빨리 깨달았더라면 고칠 수 있었을까.

솔직하게 이 물음에 대답하자면 아니, 였다. 자신은 이렇게 줄곧 살아왔었다. 쉽사리 바꿀 수 있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애초에 바꾸고 싶다고 바꿔진다는 보장도 없다. 어떻게 한다? 그 물음의 답은 명확했다. 자신은 자신의 신념을 고집할 수밖에 없다. 자신에게는 그 방법밖에는 남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휴대폰을 찾아 주소록을 주욱 내렸다. 척 봐도 협소한 자신의 인간관계에 쓴 것을 삼킨 듯 인상을 찌푸리며 책상 서랍을 열었다. 예전에 받아두었던 연예기획사 명함들이 즐비하게 놓여있었다. 신중하게 하나하나를 보던 카게야마는 하나의 명함을 제외한 나머지 명함들을 서랍 안에 도로 집어넣었다. 흰색의 명함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잠시 동안 그것을 응시하다 다시 집어 들었다. 명함에는 카라스노 연예기획사라는 인쇄된 글씨 밑에 단정한 글씨로 스가와라 코시, 라는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있었다. 잠깐의 고민을 끝낸 카게야마는 꾹 꾹 휴대폰 자판을 누르기 시작했다.


카라스노 연예기획사. 익히 들은 적이 있었다. 우카이, 라는 뛰어난 프로듀서가 있었다고. 그가 있었을 당시에는 꽤나 유명했다는 것 같다만 요새는 예전만도 못하다는 의견이 많은 기획사였다. 여러 이유도 있었겠지만 우카이 프로듀서가 건강 악화로 인해 일을 그만두게 되었던 탓이 제일 컸음에 분명했다. 그 와중에 대표의 교체도 있었다. 카라스노 기획사에 대해 최근 들은 소문은 우카이 프로듀서의 복귀였다.

카게야마는 카페의 구석진 곳에 앉아 차를 홀짝였다. 나름 변장을 하고 온 덕분인지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듯 했다. 도수가 없는 안경을 고쳐 쓰며 휴대폰 액정을 응시했다. 역시 너무 조바심내서 일찍 온 걸까. 자신은 이제 물러날 곳도 없었다.

“아, 혹시 카게야마씨?”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이전에 한번 본 적이 있는 회색머리의 사내가 말을 건네 오자 카게야마는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건넸다.

스가와라는 생긋 웃으며 인사를 한 뒤 카게야마의 맞은편에 앉았다. 가까이 다가온 점원에게 커피를 주문한 스가와라는 초조한 안색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죄송합니다.”

“아, 괜찮아요. 저도 연락을 취해볼까 하고 있던 참이고.”

 

[하이큐/아카야쿠]제목없음

하이큐 | 2014. 10. 26. 02:54
Posted by 물빛녘

※사약님께서 영업하신 아카야쿠, 사약님께서 푸신 썰로 연성

※아카아시 네타캐 맞나 ㅇㅁㅇ)...늦어서 죄송합니다...

※+켄야쿠, 쿠로야쿠 조금

 

[하이큐/아카야쿠]

written by. 티토

 

 

아, 쓰다듬고 싶어. 멍하니 벽에 기대 앉아 네코마와 카라스노의 연습시합을 응시했다. 연습시합을 보고 이 생각을 떠올리는 것은 우습긴 하지만, 야쿠상의 짧은 머리카락이 격한 움직임에 의해 흔들리는 것을 보면 왠지 그런 생각이 든다고 해야 하나. 안정적인 폼으로 리시브를 하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은, 아아, 나는 그런 짝사랑을 하고 있었다.

 

타학교의 선배. 만날 수 있는 건 합숙 한정. 눈에 담을 수 있을 때 담아야 한다. …물론 그것을 누군가때문에 방해받고 있긴 하다만. 옆에 놓여진 물병을 입에 가져가대며 원인 중 한 명인 코즈메를 바라보았다. 담담한 표정으로 토스를 올리는 그는 야쿠상을 대할 때면 표정이 달라진다. 본인은 잘 모르는 듯하나 표정이 누그러졌다. 야쿠상과 대화하고 있을 때면 어느 순간 다가와 '아카아시상, 보쿠토상이 찾는 거 같아'라는 등의 방법을 통해 떼어놓기 일수였다.

 

두번째 원인은 뭐, 역시 쿠로오상이려나. 이쪽은 확실히 고단수였다. 능숙하게 끼어들어 대화를 주도해버려 금방 쉬는 시간이 끝나는 경우가 다반사다. 가끔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나를 보곤 하던데……. 확실히 그건 의도한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애석하게도 이쪽은 고의가 아니라, 그냥 이 사람은 손이 많이 간다. 옆을 보니 좀 전의 시합으로 풀이 죽은 보쿠토상이 보였다. 아, 회복되려면 좀 걸리겠는걸. 한숨을 살짝 쉬고 야쿠상이 카라스노의 에이스의 스파이크를 받아내는 것을 본 뒤 다시금 보쿠토상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까. 무슨 말을 해야 보쿠토상이 살아나지?

 

"보쿠토상, 혹시 마지막에 블로킹 당한 것때문에 그러시는 건가요?"

 

"으…, 역시 아카아시, 오늘 나에게 토스 올리지 마."

 

아, 또 시작이다. 몰려오는 두통에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적당한 선택지는? 역시 하나밖에 없지 않나.

 

"알겠습니다. 그 대신 충분히 휴식해주세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확실히 보쿠토상은 팀의 에이스다. 그렇지만 그가 모든 것을 짊어져야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 이외의 다른 분들도 꽤나 상당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 그가 힘들어한다면 다른 이들이 받쳐주면 된다. 그래, 그러면 되겠지. 코치님의 연습시합 시작의 소리에 연습시합할 코트 위에 섰다. 어쩔까 저쩔까 하는 보쿠토상이 보였다. 결국엔 감독님의 말에 코트로 왔다만. 그래도 초반에는 역시 보쿠토상에게는 올리지 않는 게 좋으려나. 어쩌든 간에 머리는 지끈거렸다.

 

*

 

아, 드디어 끝났다. 머리에 수건을 얹고 숨을 몰아쉬었다. 두통이 또다시 찾아왔다. 자박자박 발소리가 들렸다. 수건을 목에 걸치고 그 인물을 바라보았다. 야쿠상이었다. 얼빠진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아까부터 안 좋아보이던데."

 

"아, 아, 네……. 괜찮습니다."

 

"약이라도 먹는 건 어때?"

 

"아뇨,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

 

고개를 끄덕이자 야쿠상이 눈이 가늘어지더니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뒷목을 긁적이던 그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무 무리하진 말고. 아프면 언제든지 말해."

 

야쿠상이 손을 들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갑작스런 행동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무런 반응도 못한채 멍하니 서있으니 야쿠상이 씨익 웃으면서 손을 내렸다. 좀전의 온기가 남아있는 느낌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간지러운 기분도 들었다.

 

"혼자서 다 해낼려고 하지 않아도 괜찮아. 나라도 괜찮다면 들어줄테니까 혼자 힘들어하지 말고."

 

멀찍이서 코즈메가 보였다.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총총총 걸어온 그는 야쿠상에게 쿠로오상이 찾는다는 얘기를 전하고는 나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넨 뒤 야쿠상과 함께 가버렸다. 혼자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좀전에 온기가 닿았던 머리위에 손을 얹었다. 아, 위험하다. 지금 나 얼굴 빨개져 있을지도 몰라. 단순한 위로였음에도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아, 역시 이게 짝사랑인건가.

 

*

 

뜻밖의 재회는 뜻밖의 장소에서 한다는 게 맞는가 보다. 장난감가게 앞에서 고심하던 야쿠상과 눈이 마주쳤다. 아, 야쿠상이구나. 아, 아, 아…? 여긴 어쩐 일로 오신걸까. 당황하는 나와는 다르게 야쿠상은 반갑다며 나에게 다가오셨다.

 

"여긴 어쩐 일이신가요?"

 

"아, 친척집 왔는데, 친척동생 장난감 사다줄까 해서.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네."

 

"그렇네요."

 

"아카아시는 무슨 볼일?"


"아, 저는 그냥 서점에 잠깐."


가방을 살짝 들어보였다. 그렇구나, 라며 야쿠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잠시 윈도우를 통해 가게 안을 들여보던 야쿠상은 나를 보더니 안을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아, 맞다. 이렇게 만난 것도 우연인데, 괜찮다면 고르는 것 좀 도와줄래?"


"아, 네."


야쿠상의 뒤를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아기자기한 인형들이 진열대에 가득했다. 한쪽에는 남자아이들이 가지고 놀만한 장난감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이런 곳은 어렸을 때 빼고 온 적이 없는데. 새삼 추억에 잠긴다는 것도 우습지만 진열된 자동차 장난감을 들었다가 다시 제자리에 놓았다. 아, 그러고보니 친척동생의 성별을 모르고 있었네. 고개를 들어 야쿠상을 보니 곰돌이 인형들을 보며 고민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자아이인 걸까.


"여자아이인가요?"


"응, 인형이 갖고 싶다고 했는데. 인형 많네…."


분홍색 곰돌이 인형을 잡은 야쿠상이 이리저리 곰돌이를 훑어보더니 다시 내려놓았다. 옆의 갈색 곰돌이를 집어 들더니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 못 고르겠어."


"…때타는 거 잘 보이지 않게 갈색이 낫지 않을까요?"


"그런가? 좋아, 그럼 아카아시의 추천을 받아서 이걸로 결정. 계산하고 올게."


갈색곰돌이와 함께 야쿠상은 계산대로 걸어갔다. 점원과 잠깐 대화하더니 점원이 커다란 상자 안에 곰돌이인형을 넣었다. 상자를 리본으로 묶은 점원은 야쿠상에게서 돈을 건네받았다. 상자를 들고 내가 있는 곳으로 걸어온 야쿠상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좋아하겠지? 아, 고마워, 아카아시. 뭐라도 먹으러 갈래?"


"아, 그러고 싶지만…."


좀전부터 열심히 울리기 시작한 폰을 꺼내들었다. 집에서 온 메일이었다. 가족끼리 외식나간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실망스러움에 말을 줄이자 야쿠상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입을 쭉 내밀었다. 아, 귀엽다. 왠지 모르게 야쿠상의 머리에 손이 올라가고 있었다. 쓰다듬으면 이상한 타이밍이지…. 아니, 애초에 상급생을 쓰다듬는다는 것 자체가….


"아쉽네. 이왕 만난 김에 뭔가 먹고 싶었는데. 으음, 어쩔 수 없나. 그럼 나중에 내가 쏘는 걸로."


황급히 손을 내렸다. 야쿠상이 히히 웃으시며 고개를 들었다.


"제가 한 건 별로 없는 걸요."


"하지만 나 이런 거 결단력 없어서 꽤 오래 잡고 있었을걸."


"아, 그래도…."


"괜찮아, 괜찮아.…아, 나도 빨리 가야겠다. 그럼 나중에 보자."


폰화면을 확인한 야쿠상이 다급하게 외쳤다. 몇발자국 달려가던 야쿠상이 몸을 틀어 손을 흔들었다. 나 또한 손을 흔들었다. 야쿠상이 저만치 멀어졌을 때 한숨을 내쉬었다. 아, 위험했어, 진짜…. 나도 모르게 머리 쓰다듬을 뻔 했어. 손을 왼쪽 가슴에 얹어보니 쿵쾅쿵쾅 뛰는 게 느껴졌다. 어떻게 버텼냐 할 정도로.


폰이 다시금 울렸다. 맞다, 외식. 몸을 틀어 집으로 향하다 도중에 멈춰서서 야쿠상이 걸어간 방향을 바라보았다. 아, 빨리 다시 만나고 싶다. 간질간질한 기분, 역시 싫지는 않은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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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큐/쿠로야쿠]마피아AU

하이큐 | 2014. 10. 9. 23:01
Posted by 물빛녘

※유히님 연성표 달성 보상

※캐붕

 

[하이큐/쿠로야쿠]마피아AU

written by. 티토



야쿠 모리스케는 꽤나 성실한 사내다. 명령을 받으면 어떤 일이 있어도 그것을 이행하는 충실한 부하이기도 하다. 이곳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사람을 고르지면 그건 역시 야쿠일 것이다. 그러고보니 이전에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다던가. 스스로 뒷세계에 발을 디딘만큼 큰 일이 있었음이 분명했다. 흔한 일이었다. 사정이 있어 아늑한 곳을 버리고 이곳에 온 사람들은 차고 넘쳤다. 돈이 없어서 범죄의 길에 들어섰다던가, 개인적인 원한을 갚기 위해서라던가, 꽤나 별의별 이유가 있었다. 야쿠는 어느 쪽이려나. 뭐, 눈에 가득찬 결의를 보면 복수를 위해서라는 게 분명해 보였지만. 쿠로오는 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려 불을 구둣발로 비벼 껐다. 아무래도 좋다. 무슨 이유가 있어 들어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자신의 동료였다. 등 뒤를 맡길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동료. 이 세계에서는 그 사실이 중요할 뿐이었다.

 

솔직히 안 궁금하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 몇 년을 동고동락해왔지만, 사적인 얘기는 별로 나누지 못했다. 아니, 않았다는 게 정확하려나. 하지만 무슨 말을 꺼내야할 지도 모르겠고. 정말 어렵다니까. 머리를 벅벅 긁으며 술집 안으로 들어섰다. 바에서 구석진 곳에 앉은 쿠로오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11시가 되기 5분 전이었다. 곧 들어올텐데. 턱을 괴고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탁 탁 두드렸다. 때가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바텐더 복장을 한 야마모토가 다가왔다. 쿠로오 앞에 물잔을 내려놓은 야마모토가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곧, 인가요?"

 

"어. 작전대로 이행하도록 해. 흥분하지 말고."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을 꺼내 이어폰을 꽂았다. 이어폰을 귀에 끼운 뒤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시간을 확인하니 정확히 11시였다.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조그만 불평이 들려왔다.

 

─귀찮아…….

 

"어쩔 수 없잖아. 그래서 어디쯤?"

 

─배달 완료 10초 전. 

 

야마모토처럼 바텐더 복장을 한 이누오카와 눈이 마주쳤다. 눈짓을 준 뒤 가게문을 응시했다. 문이 열리고 두 명이 들어왔다. 한 명은 배가 나온 중년의 사내, 한 명은 화려한 화장을 한 긴 생머리의 여성이었다. 검은 원피스에 보라색으로 약간의 포인트를 준 여자는 쿠로오와 눈이 마주치자 오른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아. 쿠로오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의자를 하나 두고 옆에 남자가 앉았다. 그 옆에 앉은 여자는 테이블 위에 손가락으로 원을 그리며 남자가 메뉴판을 건네 받는 것을 웃으며 바라보았다.

 

"저, 술 못 마시니까, 도수 낮은 걸로 부탁할게요."

 

아, 위험. 고운 미성이긴 하나 왠지 모를 어색한 목소리에 쿠로오는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여자가 남자 자신을 몰래 째려보는 게 느껴졌다. 그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폰을 만지작거렸다. 아직 켄마에게서 지시는 들려오지 않았다. 아직인가. 힐끔 옆을 보니 여자의 다리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여자는 스믈스믈 올라오는 남자의 손을 능숙하게 치우며 리에프에게서 술잔을 받아들었다. 아, 리에프 저 자식. 표정 관리 좀 하라니까. 여자를 보며 웃음을 참고 있는 리에프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저러닥 한소리 듣지. 여자의 눈이 살벌하게 빛났다. 그 눈빛에 리에프는 뒤로 한발자국 물러섰다.

 

─리에프……, 나중에 야쿠상에게 한소리 듣겠네. 

 

그러게 말이야. 켄마의 중얼거림에 속으로 공감하며 쿠로오는 힐끗 여자를 바라보았다. 웃으며 남자와 이야기하고 있던 여자가 쿠로오와 눈이 마주치자 입을 벙긋거렸다. ……뭐라는 거지? 뭘, 봐? 이내 여자는 중년 남자의 귀에 무엇인가를 속삭였다. 둘이서 뭔가 속닥거리는가 싶더니 바텐더에게 말을 건네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마찬가지로 그것을 지켜보던 리에프가 서류봉투를 꺼내왔다. 서류봉투를 받아 들어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소형권총이 안에 들어있었다. 리에프가 조용히 귀뜸했다.

 

"켄마상이 그거 장전되어 있대요. 안전장치는 걸려있지만요. 소음기도 장착해놓으셨대요."

 

─리에프한테서 건네 받았지? 

 

"응."

 

주위를 쓱 둘러본 다음 총을 외투 안주머니에 넣었다. 서류봉투는 고이 접어 대충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슬렁슬렁 걸어나갔다. 골목으로 들어갔을 것 같긴 한데, 어디쯤이려나.

 

─나와서 오른쪽으로 3발자국쯤. 거기서 오른쪽 골목. 

 

오른쪽으로 3발자국. 힐끔 골목 안을 확인하니 아까 두명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 저깄다. 꽤나 끈적끈적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입술을 맞부딪히는 장면에 인상을 찌푸리며 그쪽에서 자신이 보이지 않도록 자리를 잡아 벽에 기댔다. 만약 둘이 골목길에서 큰길목으로 나왔을 경우 마주칠 수 있지만 저곳에 있다면 보이지 않을 자리였다. 아, 담배 피고 싶다.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질척질척한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가뜩이나 조용한 길이건만. 아아, 마음에 안 들어.

 

─담배 필 생각하지 마, 쿠로. 

 

네네, 안 핍니다. 그나저나 언제 끝나는 거야.

 

─쿠로가 들어가는 시점은 약속한대로야. 리에프랑 다른 애들한테 뒷정리 맡기는 거 잊지 말고. 그럼 딱히 지시할 건 없으니까 통신 끌게. 

 

정말 알고 있다니까, 켄마. 이어폰을 귀에서 빼내 폰에서 분리시킨 후 고개를 살짝 내밀어 둘의 상황을 확인했다. 아, 아직도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 저 남자 파묻어버리고 싶다. 손에 들린 이어폰을 주머니 속에 넣었다. 다시 한 번 둘을 바라보았다. 아. 상황이 달라져 있었다. 여자가 남자를 벽으로 밀어부치고 오른팔로 남자의 목을 누르고 있었다. 어둠에 가려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남자의 표정은 당혹스러움으로 번져 있었다. 쿠로오는 터벅터벅 둘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기껏 등 쳐놓고 무섭긴 한가 봐?"

 

여자의 입에서 험악한 말이 튀어나왔다. 남자를 보며 살벌하게 웃은 여자는 곧이어 쿠로오를 바라보았다.

 

"늦어, 쿠로오."

 

"야박하네, 야쿠. 딱 맞춰 들어온 건데."

 

"…됐고, 이거나 좀 어떻게 해 봐."

 

왼손으로 남자를 가리키며 야쿠는 인상을 찌푸렸다. 당황했는지 새하얗게 질린 모습이었다. 품 안에 넣어뒀던 총을 꺼내 남자의 머리에 가져가 대었다. 그걸 본 야쿠는 팔을 내리고 살짝 뒤로 물러섰다.

 

"그래서 어디까지 불었어?"

 

"뭐, 뭐를……?"

 

"쿠로오, 쟤 상황 판단이 안 되나 본데."

 

"다짜고짜 불라고 하는 건 잘못된 게 아닐까 싶은데요, 야쿠상."

 

 그런가. 야쿠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뒷목을 긁적였다. 쿠로오는 물끄러미 야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 입술 번지르르하다. 좀 전의 키스로 타액이 묻어서인지 입술이 번지르르 했다. 왠지 모르게 심통이 나 남자의 머리를 총으로 툭 툭 쳤다. 겁에 질린 남자는 멍한 표정으로 서있을 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하긴 이상하기도 하겠지. 좀 전까지 부대끼던 여자가 확 돌변하고 웬 남성은 총을 들이밀고. 그렇지만 설명하긴 귀찮은데. 야쿠를 다시 바라보았다. …아, 역시 거슬린다. 야쿠의 팔을 잡아당겼다. 어떡할까 고민하던 야쿠는 갑작스런 힘에 놀랐는지 쉽게 끌려왔다. 남의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에 입술을 포갰다. 입술을 쪽쪽 빨고나서 혀로 야쿠의 고른 치아를 훑었다. 혀를 감싸려고 했을 때 야쿠가 팔을 때렸다. 결국 입술을 떼고 살짝 뒤로 물러섰다.

 

"발정났냐?"

 

남들에게 차마 들킬까 큰소리를 지를 수 없던 야쿠는 얼굴을 붉히며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만 이 놈이랑 한 거 신경쓰였단 말야."

 

"얜 일때문이고. 일때문에 한 거에 질투 좀 하지 마. 내가 뭐때문에 다리 허한 원피스 입고 이 난린데. 일이나 빨리 끝내고 가자고, 좀."

 

"네, 네. 간단한 상황 설명 들어갑니다. 아아, 그리고 지금 저희는 조직에서 나왔습니다. 이 정도면 되나?"

 

"조, 조직? 나, 난 말 안 했어! 누, 누설한 적도 없어!"

 

야쿠가 품 속에서 사진을 한 장 꺼내 펄럭거렸다. 그걸 본 남자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퍽이나. 딴 놈이랑 만나서 뭔가 주고받는 걸 찍은 놈이 있는데도?"

 

"그, 그건……."

 

"말해봐요, 대답 여하에 따라서 처우가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야쿠가 말했다. 야쿠의 눈짓에 총을 내린. 쿠로오는 총을 든 반대손을 들며 생긋 웃어 보였다. 해칠 의사 없어요, 라는 것을 알리며 뒤로 살짝 물러서자 야쿠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무슨 정보를 넘긴 건가요?"

 

"그, 그냥 습격 정보 살짝 흘렸을 뿐이야. 많이 흘리지도 않았고, 다 사실을 말한 것도 아니고. 그 왜 뭐냐, 습격인원 줄여 말했어."

 

"에에, 거의 다 말했네. 뭐, 그래도 곧 흘러갈 내용이었던 거 같고. 내부에 당신 말고도 스파이가 있는 거 확인했고. ……어쩐다? 살려줄까? 이 정도야 그냥 넘어가도 될 것 같은데."

 

"야쿠, 물러서."

 

야쿠가 킥킥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 정말 저럴 때 보면 소악마같다니까. 쿠로오는 총을 들었다. 야쿠의 말에 화색이 돌던 남자의 얼굴에 불안감이 떠오른 듯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안전장치를 풀었다.

 

"애석하지만 말야."

 

탁. 소음기덕인지 조금은 작은 발사음이 났다. 가게 안은 방음이니까 괜찮겠지. 벽에 기대있던 남자는 스르르 바닥으로 무너졌다.

 

"그걸 결정하는 건 우리가 아니라서."

 

남자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야쿠는 고개를 돌려 쿠로오를 바라보았다.

 

"가자. 애들한테 연락해. 나 빨리 옷 갈아입고 싶어."

 

"……야쿠, 키스해도 돼?"

 

"……이게 진짜 돌았나. 시체 앞에서 하고 싶냐?!"

 

"아아, 아까 진짜 충격이 컸다고. 허벅지도 가볍게 내주질 않나, 키스도 진하게 하질 않나."

 

아, 야쿠 얼굴 빨개졌다.

 

"…넌 말야, 내가 욕구 해소하는 도구로 보이냐."

 

화난 거였나.

 

"그럴리가. 난, 야쿠상, 무지- 좋아하는데."

 

"맨날 이런 얘기만 하잖아."

 

뾰로퉁한 표정의 야쿠는 발이 아픈지 자꾸 하이힐을 힐끔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총을 품안에 넣었다. 야쿠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하기야 평소에 둘이 있으면 키스를 한다거나 일 얘기로 바빴으니까. 그렇지만 무슨 얘기를 해야하는지도 모르겠고. 이런 곳에 온 사람이면 다 자기 사정을 숨기곤 하니까 쉽사리 물어보지도 못하겠고. 

 

"사적인 얘긴, 어려워. 여기에서 사는 놈들은 다 자기 사정 숨기려고만 하는 편이고."

 

"난 별로 그런 얘기 해도 상관없는데?"

 

"엣, 그럼 해도 되는 겁니까?"

 

"응, 상관없다니까. …그나저나 자리 좀 옮기지? 얘 언제까지 방치할거야?"

 

아, 그러네. 문득 남자의 시신에 눈길이 미쳤다. 전화해야지. 폰을 꺼내 야마모토에게 전화를 걸었다. 끝, 이라는 말을 하자 곧 그리로 가겠다는 말이 들려왔다. 통화를 끝내고 폰을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나 좀 업어줘, 쿠로오."

 

야쿠는 발을 가리켰다. 익숙치도 않은 하이힐을 신고 다녔으니 아픈 게 당연하겠지. 야쿠를 등에 업었다.

 

"아, 신발 어쩌지. 그냥 놔두고 가면 애들이 치우겠지."

 

…어이, 그렇다고 현장에 신발을 두고 가는 건……. 야쿠는 발을 흔들어 신발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아, 모르겠다. 그냥 가자. 켄마와 약속한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따가 이것저것 많이 얘기하자."

 

"괜찮다면 이것저것 물어봐도 되려나?"

 

"응, 괜찮다니까 그러네."

 

"……그럼 여장플해도 됩니까?"

 

"……야, 그냥 너 죽어."

 

쿠로오의 볼을 야쿠가 잡아당겼다. 이내 쿠로오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웅얼거림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어?"

 

"……이야기하고 나면."

 

"어떤 이야기를 할까?"

 

"……시덥잖은 것부터 다."

 

실없는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래, 그러자. 몰랐던 것들, 하나씩 하나씩 알아가자.

 

[하이큐/카게히나]너와 나의 약속

하이큐 | 2014. 9. 29. 00:23
Posted by 물빛녘

※카게히

※마이g님-히나타론리전 협력

※캐붕 심각



[하이큐/카게히나]너와 나의 약속

written by. 티토



“사랑해.”


내 입에서 그 말이 나온 때를 기점으로 시간이 멎은 것 같았다. 쿵쾅쿵쾅 세차게 뛰던 심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고 머리는 차분하게 식었다. 놀란 네 모습을 봐서, 라는 것만은 아니었다. 잊고 있었지만 기억해야만 했던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라는 것이 정확했다. 나는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안 될 말이었다. 사랑한다는 말의 무게를 기억해냈어야 했다. 결코 평범한 연인관계가 될 수 없는 우리 둘만의 사랑의 새로운 정의를 나는 머릿속에 새기고 있어야 했다. 사랑한다면 함께 할 수 없다. 그게 우리 둘만의 사랑 방식이었다.


너를 바라보았다. 아직 떠올리지 못한 듯 큰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괜찮지 않을까. 이번만은 괜찮지 않을까. 너와 했던 맹세를 어기고 싶은 욕망이 스물스물 피어났다. 아니다. 너랑 한 약속을 나는 어길 수 없다. 히나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어길 수가 없었다. 이 약속이 오래 전의 거일지라도, 몇 번의 굴레를 돌았을지라도 나는 지켜야만 했다.

외투 주머니를 뒤졌다. 나의 이상행동에 너는 ‘카게야마?’라고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손에 무엇인가가 잡혔다. 어머니 심부름으로 샀던 재봉용 가위였다. 다리 난간에 몸을 기댔다. 다리 아래로는 강이 흘러가고 있다. 바로 강에 뛰어든다는 것도 나름대로 괜찮은 선택지지만 금방 건져질 가능성도 다분하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너를 바라보고 있자니 예전의 네가 떠올랐다. 우리 관계가 이렇게 변해버렸던 생에서의 너였다. 너를 제외한 네 주변의 모든 것들을 지웠던 내게 너는 말했다. 나를 사랑한다면 죽어버리라고. 새로 태어나고 자신을 만나고 또 다시 사랑하게 된다면 자신의 앞에서 죽어버리라고. 아아, 그래. 그 때도 내 삶은 그렇게 끝났었지. 너의 눈앞에서 죽는 것으로 너를 더 이상 보지 못한다는 게 아쉽긴 하지만, 그것이 네 소원이라면 나는 들어줄 수 있다.


“사랑해, 히나타.”


주머니 속에서 재봉용 가위를 꺼내들었다. 너는 이상한 것을 느낀 듯 내게 손을 뻗었다. 아직도 기억해내지 못한 걸까. 하긴 이전에도 늘 너는 직전에서야 깨달았다. 그렇다면 단순하다. 재봉틀 가위를 살짝 치켜들고 있는 힘껏 목을 향해 찔렀다. 몸이 뒤로 기울어졌다.


“사랑해, 히나타.”


네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 너는 그 자리에서 언제나처럼 나를 보며 웃어야 했다. 설마하니 네가 아니라거나? 아니야, 그럴 리가. 난간에 기대 손을 늘어뜨린 너는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입가에 걸린 미소가 보였다. 아, 그래, 그 표정이야. 시야가 점점 흐릿해져갔다. 감겨오는 눈꺼풀 아래로 보인 네 눈이 왠지 모르게 슬퍼보였다.


*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나는 죽었다. 그렇다면 새로 태어나야했다. 다른 옷, 다른 언어, 다른 장소에서 전생의 일들을 떠올려야 했다. 그러나 나는 마지막으로 죽은 곳에 서있었다. 다리 위라는 것도, 외투 주머니에는 재봉용 가위가 들어있다는 것도 바뀌지 않았다. 네 표정이 결의로 가득 찼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상황이 이해가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일까.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일까. 그렇다 해도 내가 지금 해야 할 말은 알고 있다. 나는 어김없이 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내뱉는다. 그리고 주머니 속의 재봉용 가위를 꺼내 있는 힘껏 찌른다. 몸이 기울어져 다리 위에서 떨어진다. 너는 나에게 달려온다. 그래, 여기까지는 같다.


네가 나를 끌어안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몇 번의 생에서 너를 만났지만 이런 일은 없었다. 뭐가 잘못되어도 잘못됐다. 너는 힘껏 나를 끌어안았다.


“이제 그만해.”


울먹이는 네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도대체 뭘 그만하라는 걸까. 나는 그저 네가 바라던 대로 했을 뿐인데.


“사랑해, 카게야마.”


아. 순간적으로 사고회로가 정지했다. 너무나도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짧은 말이었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아, 그렇구나. 그래, 히나타. 다시 태어난다면 남들처럼 평범한 사랑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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