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바스/화청]너하고 나

쿠로바스 | 2015. 3. 1. 12:23
Posted by 물빛녘

※카가아오

 

[쿠로바스/화청]너하고 나

written by. 티토

 

 

 

 아, 이건 좀 아닌 듯. 카가미는 침대에 널부러진 남자를 보고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술에 떡이 되어서 들어왔냐. …이건 사람이 아닌 거 같은데. 발로 외투도 채 못 벗은 아오미네를 밀었다. 끙, 소리를 내는가 싶더니 그대로 입을 쩝쩝 다시며 잠이 드는 녀석에 기가 막혀 얼굴을 발로 눌러줬다. …어, 그래도 안 일어나네. 이제는 경탄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카가미는 어깨를 으쓱하며 아오미네의 외투를 벗겼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떡이 되도록 이 녀석한테 먹인 건지. 겉보기완 다르게 술에 약한 아오미네의 등짝에 손바닥을 날려준 뒤 일어섰다.

 

 일단 해장국이라도 만들어 둬야 할까. 앞치마를 둘러 맸다. 정말 저 녀석이랑 동거하면서부터 성가신 일도 많다니까. 아, 부엌에서 한숨은 좀 그런가. 어차피 같이 살자 한 것도 자신이었고. 아아, 어째서, 였더라. 언제부터 저 녀석이 좋아졌는지. 처음 붙었던 인터하이에서? 글쎄, 그건 아니었던 것 같고. 다시 붙었던 윈터컵? 아, 그 때는 조금 그랬을 지도? 좋다, 라고 느낀 건 언제부터였나.

 

 아, 지금 이게 중요한 건 아니지. 카가미는 냉장고에서 콩나물을 꺼냈다. 콩나물국이면 되겠지.

 

 라디오를 틀었다. 경쾌한 남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익숙한 목소리인데. 키세냐. 그러고보니 쿠로코한테서 들었던가. 라디오 방송 진행? 이것저것 주절거리던 키세의 목소리가 끊어지고 노래가 흘러나왔다. 아, 팝송.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콩나물을 냄비에 집어 넣었다.

 

 보글보글 끓는 소리를 들으며 카가미는 뒤를 힐끔 바라보았다. 신음소리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좀 줘? 무슨 소리야. 미심쩍은 표정으로 가스불을 끈 뒤 안방으로 걸어갔다. 엎드린 상태로 상체만 일으킨 아오미네가 보였다. 어, 깼나. …표정이 좋지 않은걸. 찜찜한 기분에 계속 바라보고 있으니 아오미네가 뭔가를 꾹 참는 듯한 표정으로 볼을 부풀렸다. 아. 정신이 번쩍 들었을 때는 그대로 우웩. 아, 신이시여.

 

"Oh, my god."

 

 카가미는 짧은 탄식을 내뱉으며 다시 뻗어버린 아오미네를 바라보았다. 저, 웬수 덩어리. 해탈한 기분이 이런 건가. 걸레를 들고 와 닦았다.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걸까. 바닥을 닦은 뒤 술 취한 주정뱅이를 응시했다. …다행아다. 침대에는 안 묻었네. 빨랫통에 쌓인 빨래들이 생각났다. 그건 또 언제 빨고 널고 한다냐. …우선 이 놈부터 어떻게 할까. 걸레를 대충 화장실에 던져 놓은 뒤 수건을 한 장 들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들고 온 수건으로 아오미네의 입가를 닦았다. 이 놈이 난 대체 뭐가 좋아서 같이 살자고 한 걸까. 한숨을 내쉬었다. …아, 눈 마주쳤다.

 

"으어, 으어아, 으어어……."

 

"외계생명체냐."

 

"시꺼어어, 머리 울려……. 허리도 아파……."

 

 카가미는 그 순간 입을 다물었다. ……죄송합니다. 자제력이 떨어져서 미안하다. 뒷목을 긁적이며 다른 한 손으로 아오미네를 굴려 제대로 눕혔다. 이불을 덮어준 뒤 침대에 걸터 앉았다.

 

"야……."

 

"왜."

 

"너 취향 독특한 거 아냐."

 

 카가미는 고개를 돌려 아오미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또 어딜 가서 뭘 들었길래.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푸른색 천장이다. 푸른색……. 그러게 말야. 덩치가 큼지막한 녀석이 뭐가 좋다고. 입가를 매만졌다. …나 그렇게 취향 독특했었나. 딱히. 타츠야가 남자를 사귄다는 것에도 별 거부감 없었으니 동성애에 대한 건 관대한 편이었고. …내가 이렇게 될 지는 몰랐지만.

 

"뭐, 어때. 좋아하는 데 이유 있나."

 

"…뭔가 짜증나는데, 너."

 

 …이건 싸우자는 건가.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니 아오미네가 몸을 뒹굴 굴려 벽을 응시했다. 아, 귀가 묘하게 빨갛다.

 

"I love you."

 

 놀려주자는 심보 반, 진심 반으로 말했다.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등에 무언가 부딪혔다. 얼굴? 고개를 돌리려고 하니 돌리지 말라는 조그만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진짜.

 

"…Me, too."

 

 푸핫, 웃음이 터져 버렸다. 정말 미워할 수 없잖아. 은근 귀여운 구석이 있다니까. 뭐, 나름 괜찮잖아. 너하고 나, 이렇게 둘이라는 거.

 

아오키세 

 

[쿠로바스/청황]꽃샘추위, 다시 너와 함께

written by. 티토

 

 아, 춥다. 아오미네는 손을 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으며 건물 밖으로 나왔다. 저녁 7시밖에 되지 않았지만 하늘은 어느새 어두워져 있었다. 평소보다 이른 퇴근이긴 하나 연구가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태라 모두 간만의 휴식을 즐기려는 듯 하나둘씩 빠져나가 주차장 안에 있는 것은 아오미네의 차뿐이었다. 아, 젠장. 나도 그냥 빨리 나오는 건데. 이것저것 조사한다고 앉아 있었더니 온몸이 찌뿌둥했다. 아오미네는 뭉친 어깨근육을 손으로 풀며 자신의 차로 걸어갔다. 시동을 걸고 연구소를 나서려다 문득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푸른빛을 띤 3층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오미네는 쓰게 웃으며 핸들을 검지로 톡톡 건드렸다. …오늘도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아오미네의 차는 연구소 정문을 부드럽게 통과했다. 아오미네는 목에 걸린 ID카드를 벗었다. 그리고서는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는 자신의 사진 아래에 적힌 문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오미네 다이키, 유전자 공학 연구소. 신호가 바뀌자 ID카드를 대충 외투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액셀을 밟았다.

 

 솔직히 자신이 이 연구소에 들어오게 될 거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대학 졸업 후 이제 어떡해야 고민하고 있던 때에 연구소장인 아카시로부터 제의가 들어왔다. 아카시 세이쥬로, 동기에게 들은 적이 있는 사내였다. 완벽주의자에 줄곧 수석만 해오던 냉혈한이라고. 정말 그럴까 했지만 처음 면 대 면을 했을 때 그건 루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농담도 할 줄 알고 웃을 줄도 아는 인간적인 사내였을 뿐이다. …완벽주의자는 사실인 것 같다만. 다만 아카시의 소개로 알게 된 부소장 미도리마는 들은 대로였다. 괴짜에 오하아사 신자에. 과연 어울릴까 하는 두 사람이 가장 친구 사이라니 아오미네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오미네가 보기에 둘 사이의 유일한 공통점이라고는 완벽함을 추구한다, 정도였다.

 

 눈 앞에 주택가가 나오자 아오미네는 속도를 줄였다. 빨간 지붕이 덮인 2층 집 차고에 차를 세운 뒤, 차에서 내렸다. 어디 보자. 외투 주머니를 뒤적여 손에 잡힌 것을 꺼냈다. …ID카드는 아니고. 껌도 아니고. …열쇠 어디 갔지? 미간을 찌푸린 채 오늘 자신이 집 열쇠를 어디 두었나, 곰곰이 되짚어 보던 아오미네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바지 주머니에서 집 열쇠를 꺼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싸늘한 공기가 아오미네를 맞이했다. 손을 뻗어 거실 불을 켜자 어젯밤 어질러 놓았던 꼴이 그대로인 것이 보였다. 저걸 또 언제 치워. 굴러다니는 맥주 캔들을 대충 발로 밀어둔 뒤 쇼파에 앉았다. 몰려오는 수마에 아오미네는 눈언저리에 손을 얹었다. 벌써 잠들면 안 된다.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띵동, 초인종 소리에 게슴츠레 눈을 떴다. 벽에 걸린 시계는 7시 5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3분 뒤면 8시. 이 시간에 올만한 사람이 있나 나열해보았지만 딱히 없었다. 그야 자신은 원래 이 시간이면 연구실에 있을 테니까. 귀찮음을 무릅쓰고 일어나 현관문을 열자 아오미네는 그곳에 분홍머리의 여성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츠키.”

 

 반쯤 잠긴 목소리로 여성의 이름을 부르자 사츠키라고 불린 여성은 아오미네 뒤에 펼쳐진 관경에 인상을 찌푸렸다.

 

“모모이, 라고 부르라니까. 정말, 아오미네 군, 평소에 이렇게 사는 거야?!”

 

 예전에는 이름을 불려도 별말하지 않더니만, 성인이 되고 남자친구가 생긴 뒤로부턴 성을 부르라고 난리다. 아오미네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며 벽에 기대어 섰다. 거실을 휙 둘러보던 모모이는 스웨터 소매를 걷었다. 아무래도 더러운 꼴은 못 보겠나 보다. 텅 빈 맥주 캔을 한 손에 두 개씩 집더니 부엌으로 걸어간 모모이는 기가 차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설거지할 게 산더미잖아!”

 

“아.”

 

“아, 가 아니라구. 분명 설거지하기 귀찮으니까 접시 여러 장 사다놓은 거지?”

 

 맥주 캔을 한 곳에 모아두고 거실로 돌아가 분주히 물건들을 치우던 모모이는 멀뚱히 서 있는 아오미네를 보고서는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아오미네 군이 하면 더 어질러질 것 같으니까 다른 곳에 가 있어.”

 

 그렇게 아오미네는 자기 집 거실에서 쫓겨났다. 침실로 들어온 아오미네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바닥에는 옷가지들이 널려 있었다. …아, 이거 보면 또 뭐라 할 텐데. 황급히 옷가지들을 모아 침대 밑으로 밀어 넣었다. 거실에서 모모이가 왔다갔다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모모이가 자신의 집에 들려 청소해주는 일도 자그만치 5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전에는……. 아오미네는 쓰게 웃었다. 아직 죽지 않았는데 이렇게 사색에 잠기다니. 분명 다시 그 일상이 돌아올 텐데.

 

 아오미네는 몸을 일으켜 침실 안쪽의 문을 열었다. 웅웅, 기계 소리가 들려 왔다. 어두운 방 안에서는 무언가 둥근 물체가 어렴풋이 빛을 내고 있었다. 흰색의 크고 둥그런 물체, 그것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선들, 안을 볼 수 있도록 만든 동그란 모양의 유리창이 있는 문. 아오미네는 그것들이 뭔지 알고 있었다. 저 등근 물체 안에는 양수가 들어 있다. 그렇지만 안에 들어있는 건 태아가 아니다.

 

 발을 움직여 문 앞에 섰다. 문에 나 있는 유리창을 통해 긴 속눈썹을 가진 남자가 보였다. 태양 같은 금빛 머리카락은 물에 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손을 뻗어 유리창에 살짝 얹었다. 아오미네는 무언가 울컥 올라오는 기분에 이를 악 물었다. 그러나 이내 힘없이 웃으며 손을 내렸다.

 

“다녀왔어, 키세.”

 

 5년 동안 잠들어 있는 연인이여.

 

 아오미네는 눈을 질끈 감았다. 금방이라도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볼 것만 같은 그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었다. 어째서일까. 분명 내상도, 외상도 다 치료가 되었을 것이다. 심장도 제대로 뛰고 있다. 살아있는데 어째서 눈을 뜨지 않는 걸까. 어째서 내게 웃어주지 않는 걸까.

 

 첫 만남은 참으로도 기묘했다. 자신과는 인연이 없을 것 같던, 학교의 왕자님. 키세는 그런 사람이었다. 학교 내에서 어딜 가나 주목받는, 여자아이들의 우상. 그렇다고 해도 남자들과 서먹한 관계는 아니었다. 누구나 그의 웃음을 보면 덩달아 웃게 되는 사람이었다. 저렇게 많은 사람들의 중심에 있으니 언제나 행복하겠구나, 라고 생각해서일까 옥상에서 마주친 그의 모습에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항상 웃고 있을 것 같던 그가 학교 옥상에 숨어 숨죽여 울고 있었다.

평소라면 조용히 자리를 떴을 자신인데, 그 날 왜 그렇게 할 수 없었는지. 하기야 그 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평생 너와 이야기 나눌 일은 없었겠지만.

 

 아오미네는 감았던 눈을 떴다. 어슴푸레한 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변함없이 키세는 잠들어 있었다. 그 때처럼 울지도, 웃지도 않은 채로 그렇게 쭉.

 

“오늘은 기분이 어때? 나, 오랜만에 일찍 왔는데.”

 

 아오미네는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거, 기억 나냐? 그 왜, 고등학교 2학년 겨울에, 방학하기 전인데 네가 바다 가고 싶다 해서 몰래 학교 빠져 나오다가 학주한테 걸린 거. 결국엔 반성문 쓴다고 그날 바다 못 갔잖아.”

 

 학교 후문 쪽 담을 네가 먼저 넘고 내가 넘었는데 그 앞에는 학생주임선생님이 서 계셨지. 너는 굳어 있고 말야. 아오미네는 뒷말을 삼켰다. 자신이 말하지 않아도 그 또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둘이서 바다가 너무 가고 싶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로 A4용지 한 장을 채워서 냈다가 혼났던 것도. 다시 반성문을 쓰면서 뭐라 쓸 지 끙끙댔던 것도.

 

“아, 그것도 있다. 너랑 같은 반 안 시켜주면 학교 안에 있는 풀들 다 뽑아버릴 거라고 교무실에서 난동 부렸는데.”

 

 너는 창피하다며 옷자락을 잡아 당겼었지. 뭐, 결국엔 같은 반이 되었다만. 또 뭐가 있더라. 아오미네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 이내 씨익 웃으며 키세를 바라보았다.

 

“고등학교 1학년 축제날에 너 여장한 거, 사진 아직도 있다. 지운지 알았지?”

 

 소리 내어 웃었다. 웃음소리는 이내 잦아들었다. 등 뒤로 모모이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오미네는 입술을 힘겹게 움직였다.

 

“내일 보자, 키세.”

 

 웃는 얼굴로 나를 보는 너를 볼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아오미네는 발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왔다. 문을 닫고 고개를 들자 모모이가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하던 그녀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잠시 동안 아오미네를 말없이 응시하던 모모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밥 차려 뒀어, 였다.

 

“밥 좀 제대로 챙겨 먹어.”

 

 밥을 입에 구겨 넣는 아오미네를 보며 모모이가 핀잔을 건넸다. 우물우물 열심히 씹던 아오미네는 물을 벌컥벌컥 마신 다음 입을 삐죽였다.

 

“제대로 챙겨 먹고 있어.”

 

“거짓말. 냉장고에 맥주밖에 없던데? 내가 반찬 안 들고 왔음 어쩔 뻔 했어?”

 

“아, 이거. …사 온 거지?”

 

“아니거든! 내가 제대로 만들어 온 거란 말야!”

 

 아오미네는 입을 쩍 벌린 채로 모모이를 바라보았다. 누가 만들어? 내 눈 앞에 있는 사람?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모모이는 입을 쭉 내밀며 말했다.

 

“…테츠 군이랑 같이 만들었어.”

 

“그러면 그렇지.”

 

 고생이 많았겠는걸, 테츠. 분명 이거 테츠 녀석이 다 만든 거겠지. 아오미네는 다시 젓가락을 움직였다. 물끄러미 아오미네를 바라보던 모모이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아까 말야.”

 

“아까?”

 

“역시 아오미네 군, 그거 여전히 하고 있는 거지?”

 

 아오미네의 젓가락질이 멈췄다.

 

“그렇지? ……키세 군.”

 

“……어.”

 

“…응, 그래.”

 

 모모이는 테이블 밑으로 손을 꼼지락거리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오미네는 묵묵히 입안 가득히 반찬을 넣었다. 잠시 적막감이 맴돌다 모모이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어때, 맛있지?”

 

“그래봤자 테츠가 다 했을 텐데.”

 

“……나도 했다니까?!”

 

“아아. 너 언제 가?”

 

“아오미네 군, 다 먹으면.”

 

“다 먹었어.”

 

“설거지하고.”

 

“…….”

 

 설거지를 마친 모모이가 나가자 순식간에 집 안이 조용해졌다. 아오미네는 노트북을 들고 와 거실 테이블에 놓았다. 특유의 음과 함께 화면이 켜지자 마우스를 움직여 폴더 하나를 눌렀다. 방대한 양의 파일이 화면에 가득 찼다. 아오미네는 눈을 감고 검지로 테이블을 톡 톡 쳤다.

 

 이 안에 들어 있는 파일들의 내용은 몇 번이나 읽어 외울 정도였다. 몇 년간 식물인간으로 살던 사람이 깨어났다 라든가, 양수를 이용한 치료기기를 통한 치료가 얼마나 걸렸냐는 것 등에 자료들이었다. 모두 다 키세처럼 사고를 당해 죽음 문턱까지 간 사람들이었다. 현재 의학으로는 어머니 자궁 같은 환경을 만들고 사람을 그 안에 넣어 치료하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심리적으로 가장 편안한 환경을 조성해 회복을 빠르게 만든다. 그렇지만 이 방법으로 일상생활에 복귀한 사람도 3년이 최대였다. 그 이상 넘어가면 기다리는 사람도 지치기도 하거니와 심장이 갑자기 멈추거나 뇌사 상태에 이르는 등 치료를 포기해야하는 상황이 다가오기 때문이었다.

 

 키세가 사고를 당한 후로 5년이 지났다. 하지만 키세의 경우는 조금 독특하다. 심장도 규칙적으로 뛰고 있고, 뇌도 정상적으로 기능한다. 마치 잠을 자고 있는 것과 같다. 더군다나 보호자와 관리자가 동일하다. 이 기계를 집에 설치할 경우 의료담당자가 붙게 되는데 그것을 아오미네 자신이 맡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오미네는 언제까지나 그를 기다릴 수 있었다.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뭐가 문제인 걸까. 안의 양수도 규칙적으로 갈아주고, 기계 조작도 제대로 해뒀는데. 혹시 양수와 비슷한 성질의 액체를 만들 때, 들어간 성분이 잘못된 걸까. 아오미네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매일 확인했지만 변질된 것도, 잘못 넣은 것도 없었다. 대체 왜, 그는 깨어나지 않는 걸까. 무슨 꿈을 꾸고 있기에 계속 잠만 자는 걸까. 머리를 쥐어뜯었다. 머릿속이 불안함으로 가득 찼다. 마지막 가정은……, 그가 살고 싶은 욕망이 없다, 라는 것. 주먹을 꽉 쥐어 테이블을 내려쳤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어. …하지만 진짜라면?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괜한 조바심 내지 말자. 피로가 한 번에 몰려와서 그래. 샤워하고 자면 머리가 말끔해지겠지. 아오미네는 노트북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비틀 욕실으로 향했다.

 

 샤워를 마치고 머리까지 말린 아오미네는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잠이 안 와. 몸을 뒤척이자 텅 빈 옆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눈을 질끈 감았다. 5년이 지나도 혼자 자는 건 익숙해지지 않았다. 품 안에 들어오는 따스한 몸의 온기가 없다는 것이 이렇게 외로운 것이라는 걸 널 만나기 전까지는 몰랐는데.

*

 꿈을 꿨다. 세계가 무너지고 있었다. 건물, 도로, 나무, 뭐 하나 성한 게 없었다. 하늘은 녹아내리듯 검게 물들었다. 피해야 해.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키세, 키세, 키세! 목 놓아 너의 이름을 불렀다.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저 여깄슴다, 아오미넷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요란한 소음 사이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굴을 환하게 밝히며 목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아,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망가자, 키세. 찾다보면 몸을 피할 곳도 있을 거야. 내 말에 너는 생긋 웃었다. 키세? 의아함에 네 이름을 다시 부르자 너는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전, 아무데도, 가지, 않슴다. 띄엄띄엄 말을 잇던 너는 입을 다물었다. 어째서? 왜? 대답 좀 해 봐, 키세! 그 때 네 머리 위로 건물 잔해가 떨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뛰어가려 했지만 거리는 멀었다. 젠장, 키세, 피해! 다급하게 외쳤다. 너는 그저 웃을 뿐, 아무런 대답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대로―.

 

 꿈에서 깨어났을 때는 온 몸이 식은땀으로 흥건한 상태였다. 아, 아, 아. 벌린 입 사이에서 탁 막힌 것 같은 신음소리만 흘러나왔다. 이건 분명 개꿈이다, 개꿈인데……. 답답함에 가슴을 쳤다. 몇 번 두드리고 나서야 막혔던 것이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오미네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키세…….”

 

 고개를 살짝 들어 키세가 잠들어 있는 방으로 통하는 문을 바라보았다.

 

“키세, 너 거기 있는 거 맞지?”

 

 목구멍을 비집고 간신히 나온 말은 몹시도 떨리고 있었다. 침대에서 내려와 문 앞으로 걸어갔다. 조심스레 손잡이를 돌렸다. 열린 문 틈 사이로 발을 내딛었다. 기계는 웅, 웅, 소리를 내며 정상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심박 수 정상. 현재 깊은 수면 상태에 빠져 있음. 아까와 같은 상태였다. 아오미네는 키세가 잠들어있는 탱크에 기대어 앉았다.

 

“제발 좀 깨어나 줘.”

 

 내가 너에게 뭘 잘못한 거냐. 아오미네는 낮게 울부짖었다. 좀 전의 악몽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어째서 너는…….

다리를 끌어당겨 얼굴을 파묻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쉽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

 

 정말 미쳤다고 생각했다. 밤을 지새우다 겨우 잠이 들었다. 그래, 이건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지. 잠든 장소가 난방을 돌리지 않는 방이라는 게 문제지. 목에서 컬컬한 기운을 느끼며 아오미네는 흰 셔츠를 꺼내 입었다. …어, 단추가 안 맞는데. 거울을 보니 하나씩 밀려서 잠겨 있었다. 미치겠네. 단추를 하나씩 끌렀다. 마음은 급하고 몸은 따라주질 않고, 간밤에 또 꿈을 꾼 것 같은데 기억은 안 나고. 단추를 다시 채운 아오미네는 바지를 갈아입었다.

 

“아침 먹을 시간도 없잖아…….”

 

 두꺼운 외투를 위에 걸친 후 현관문을 나섰다. …집 잘 보고 있어라.

 

*

 

 어떻게 온지도 기억이 안 난다. 아오미네는 ID카드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책상에 엎드렸다. 아직 하루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이렇게 녹초가 될 줄이야.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사용하고 있던 쿠로코가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아오미네를 바라보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어, 어.”

 

“…어제 모모이 상께 들었습니다만.”

 

 갑자기 말 꺼내는 거냐. 아오미네는 상체를 엎드린 채로 고개를 돌려 쿠로코를 응시했다. 흘깃 그 모습을 보는가 싶더니 쿠로코는 시선을 노트북 화면에 고정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직도 그 치료를 계속하시는 겁니까?”

 

“걔는 애인이라고 또 너한테 다 일러 바쳤냐.”

 

“질문에 대한 대답이 제대로 되지 않았는데요.”

 

 아오미네는 쿠로코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담담한 눈빛. 사츠키는 도대체 얘 어디가 좋다는 건지.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그래, 됐냐.”

 

“네.”

 

 만족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쿠로코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노트북을 끄고 차트와 볼펜을 챙긴 쿠로코는 그럼 이만, 이라고 말하며 의자를 밀어 넣었다. 개인 연구인가. 아오미네는 연필통에 담긴 펜을 잡았다. 습관처럼 볼펜을 돌렸다. 팽그르르, 검지손가락 위에서 돌아가던 볼펜이 툭, 떨어졌다.

 

“어라―, 미네칭이다.”

 

 느릿느릿한 어조로 말한 보라색 머리 남자는 과자를 품에 한가득 안고 있었다.

 

“무라사키바라, 너 그렇게 과자 많이 먹으면 아카시한테 혼날걸.”

 

“으응, 괜찮아. 어차피 여기서만 먹을 거구, 아카칭은 지금 개인연구 중이구.”

 

“미도리마는.”

 

 아오미네가 말을 끝냄과 동시에 문이 드르륵 열리며 미도리마가 들어왔다. 무라사키바라를 발견한 미도리마는 안경을 한 번 치켜 올리더니 매서운 눈빛으로 무라사키바라를 응시했다.

 

“무라사키바라.”

 

“우응―.”

 

 뚱한 표정을 지으며 무라사키바라가 과자 한 봉지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나선 손 씻고 올게, 라며 자리를 떴다. 아카시가 황급히 나가는 무라사키바라를 힐끔 보며 안으로 들어왔다. 자기 자리를 찾아가 위에 놓인 종이를 확인하던 아카시는 아오미네를 바라보았다.

 

“다이키, 오늘 안색이 안 좋은데.”

 

“아, 아아.”

 

 매의 눈이다. 아오미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감기 걸린 것 같아.”

 

“…아오미네 군도 감기에 걸리는 겁니까?”

 

“…걸리면 안 되냐.”

 

 어느새 돌아온 쿠로코의 입에서 나온 말에 아오미네는 입을 삐죽이며 대답했다. 쿠로코는 차트를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조금 의외라서요. 아오미네 군은 감기에 안 걸리실 줄 알았는데.”

 

“걸려서 미안하네.”

 

 노트북을 탁탁 두드리던 아오미네는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아카시가 여전히 자신을 보고 있었다.

 

“뭔가 할 말이라도?”

 

“아아, 그렇네. 다이키.”

 

 아카시의 표정이 한층 더 진지해졌다. 덩달아 얼굴을 굳히며 응시하자 아카시는 책상 위에 놓인 종이를 매만졌다.

 

“어제 늦게 퇴근하던데.”

 

 엄연히 따지자면 평소보다 일찍 퇴근한 편이지만 현재로써 딱히 연구에 몰두하고 있지 않은 자신이었기에 아오미네는 입을 다물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옆에 앉아있던 쿠로코가 흘깃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냥, 뭐……. 슬슬 개인 연구도 다시 시작해야겠고.”

 

“그게 아니라 찾고 있던 거 아냐? …살릴 수 있는 방법을.”

 

 머리를 긁적이고 있던 아오미네는 그 즉시 행동을 멈췄다. 입이 바싹 타들어갔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개인적인 견해야. 가망이 없어.”

 

 그 말을 끝냄과 동시에 아카시의 폰이 울렸다. 인상을 쓰고 액정을 응시한 아카시는 귀에 폰을 가져가며 방을 나갔다. 잠자코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미도리마가 패닉에 빠진 아오미네에게 말했다.

 

“솔직히 그 점에 있어서는 나도 동감이라는 거다.”

 

 안경을 고쳐 쓴 후 미도리마가 말을 이었다.

 

“이건 의지의 문제다. 본인이 살고 싶어 했다면 진즉에 깨어났을 거라는 거다.”

 

“…그 녀석이, 죽고 싶어 할 이유는 없어.”

 

 아오미네는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미도리마는 하얗게 질린 아오미네의 얼굴을 보다가 시선을 돌려 자신의 노트북 화면으로 향했다. 잠깐 동안 무라사키바라가 과자를 먹는 소리만 들렸다. 탁, 탁, 뭔가를 치는가 싶더니 미도리마가 다시 아오미네를 응시했다.

 

“그건 모를 일이지.”

 

 노트북을 닫은 미도리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몇걸음 옮기던 그는 잠시 멈춰 서서 말했다.

 

“아오미네, 네가 키세는 아니란 거다.”

 

 그러니 네가 키세의 속을 다 알 수 있을 리가. 단호하게 말을 내뱉은 미도리마는 이내 발을 움직여 밖으로 나갔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과자를 와삭 베어 물던 무라사키바라가 쿠로코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일인 거야? 쿠로코는 머릿속에서 단어를 골랐다. 옆에 아오미네가 있으니만큼 쉽게 대답할 수 없었던 쿠로코는 잠시 주저하다가 무라사키바라의 의문에 대답했다.

 

“키세 군에 관한 일입니다.”

 

“키세? 아―, 키세칭? …에에, 뭐야. 미네칭, 아직도 그거 하고 있던 거야? 이쯤되면 포기하는 게 좋아.”

 

“신경 꺼.”

 

 아오미네는 날카롭게 대답했다. 뭐야, 죄다 반응들이. 아직도, 라니. 분명 이 치료법을 시작한 초기에는 다들 이런 저런 조언을 해주며 키세가 하루 빨리 이 연구소에 돌아오기를 바랐었는데. 왜 다들 아직도 하는 거냐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런 기분 나쁜 꿈을 꾼 것만도 못해서 이젠 모두 포기하라고 하는 거냐고.

 

“으응, 뭐 내가 뭐라 할 처지는 아니지만.”

 

 어깨를 으쓱하며 개인연구를 하러간다는 말을 남기고 무라사키바라 또한 밖으로 나갔다. 문자를 확인한 쿠로코는 노트북을 접어 옆구리 사이에 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들 아오미네 군을 생각해서 하는 말입니다. 저 또한, 그렇게 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아, 그리고 아카시 군이 오늘 일찍 가셔서 쉬라고 전해주라 하시더군요.”

 

 말을 마친 쿠로코는 등을 돌려 나갔다. 젠장,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아오미네는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키세, 키세, 키세. 쉴 새 없이 키세를 불렀다. 네가 미치도록 보고 싶어.

 

 열이 오르는 느낌이었다. 아오미네는 결국 노트북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외투를 챙겨 입고 밖으로 나섰다. 찬바람이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외투를 단단히 여미며 차에 올라탔다. 핸들을 잡았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눈을 감고 숨을 고른 아오미네는 시동을 걸었다.

 

*

 

 집에 어떻게 왔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외투를 대충 집어 던진 아오미네는 침대에 엎어졌다. 젠장, 미치겠다. 욕설이 입 안에 맴돌았다. 나는 왜 이러고 있는 걸까. 대체 어떤 믿음으로 널 기다리고 있는 걸까. 네가 정말 내 곁에 돌아 올 수 있는 걸까.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문을 열었다. 여전히 웅웅거리며 있는 기계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안에 있는 너 또한.

 

“키세.”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키세.”

 

 계속해서 이름을 불렀다. 제발 이제 돌아와 주면 안 되냐. 내가 그렇게 많은걸 바라고 있는 건 아니잖아. 그냥 네가 살아 돌아오길 바라는 것뿐인데. 그게 그렇게 내게 과분한 거냐. 아오미네는 아랫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자신도 뭐하고 있는 건지. 내가 이렇게 약해져서야 되겠냐고. 삑, 삑. 기계음이 들렸다. 어라, 뭐지. 아오미네는 화들짝 놀라 기계로부터 살짝 떨어진 컴퓨터를 응시했다. 코드가 뽑혀서 나는 소리는 아니다. 그렇다고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다. 그럼 뭐지? 멍하니 기계에 난 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키…세?”

 

 아오미네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아직 눈을 뜬 것은 아니었다. 그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분명하다. 키세는 약간 울 것 같은 미소를 입가에 걸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런 표정이 없는 얼굴로 잠에 빠져 있던 것과는 다르다. 아오미네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난, 틀리지 않았어.

 

*

 

 거리에 봄기운이 가득했다. 아아, 벌써 봄이 찾아 온 건가. 아오미네는 손을 창밖으로 뻗어 바람의 스침을 느꼈다. 꽃망울이 맺히고 싹이 트는 계절. 이제 키세도 깨어날지도 몰라.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너와의 첫 데이트도 이렇게 따뜻한 봄날이었는데. 근처 공원이었지만 그래도 행복했는데. 서로의 아이스크림을 뺏어먹는 것도 그렇게 재밌던 나날들이었는데. 그래, 다시 그런 날로 돌아갈 수 있어. 아아, 빨리 깨어나면 좋을 텐데.

 

 네가 돌아온다면 가장 먼저 뭐부터 할까. 아, 그래. 지난 5년간의 일들을 말해주자. 매일 너에게 말을 걸었지만 너는 잠들어 있었을 테니 못 들었을지도 몰라. 가장 먼저 그것부터 하자. 그리고 또 뭘 할까. 놀이동산? 아, 그건 좀 무리이려나. 음, 그것도 괜찮을 거 같아. 집에서 하루 종일 조용한 일상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너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니까. 그리고 네가 먹고 싶어 했던 것들을 먹고, 영화 DVD도 빌려와서 하루 종일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아, 그냥 너와 함께 있고 싶은걸.

 

 그 뒤에는 네 얘기를 들려줘. 어떤 꿈을 꿨고 꿈속에서 무얼 봤는지. 시시한 꿈이어도 좋아. 그냥 네 목소리가 듣고 싶어. 네 무릎에 누워 눈을 감고 네 목소리를 듣고 싶어. 그저 그것만이라도 좋아. 그러니까 제발.

봄이니까,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는 봄이니까.

*

 

 방 안이 엥 엥 소리로 가득 찼다. 어째서? 아오미네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응시했다. 분명 괜찮았다. 봄이었다. 그러니까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다. 따뜻한 봄내음과 함께 돌아와 예전처럼 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째서? 내가 많은 걸 바란 거냐. 단지 예전으로 돌아갔으면 했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 잘못했던 거냐고. 책상을 내리쳤다.

 

 수치가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잠잠하던, 잠을 자고 있던 그 때와는 달랐다. 이건 정말 위험해. 진짜 죽을 지도 몰라. 그렇다고 해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었더라. 다리에 힘이 풀렸다. 멍하니 그가 잠들어있을 기계를 바라보았다. 이게 네 진심이었냐, 키세.

 

 환기를 위해 열어둔 조그만 창문을 통해 싸한 바람이 들어왔다. 봄, 아니었나. 창문 앞에 섰다. 쌀쌀한 공기.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봄기운이 물씬 풍기던 것 같았는데.

 

 아오미네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기나긴 겨울은 아직 끝나지 않은 건가.

*

 거의 넋 나간 상태로 며칠을 보냈던 것 같다. 주변 사람들도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오미네는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시선에 담긴 연민, 동정. 이제 현실을 깨달은 거냐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직 키세는 기계 안에서 잠들어 있었다. 이제 정말 결단을 내려야할지도 모른다. 입안이 텁텁해졌다. 하고 있던 목도리를 풀었다. 어느 순간 다시 따뜻해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봄이니까 돌아올 거란 기대 따위는 하지 않았다. 이미 그 기대는 무너진 지 오래다. 헛된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아오미네는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 언제나처럼 웅 웅 거리는 기계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이 소리도 5년 만에 사라지겠지. 마지막으로 기계 앞에 섰다.

 

 안녕, 키세. 이제 보내 줄게.

 

 기계 가동을 중지하고 너를 꺼내서 바다에 뿌려줄게. 언제 네가 원했던 것처럼. 바다에 뿌려달라는 네 소원처럼.

 

 손을 기계 위에 얹었다.

 

“안녕.”

 

 눈을 질끈 감았다. 몇 발자국만 움직이면 기계를 관리하고 있는 컴퓨터 앞에 설 수 있다. 그리고 조작을 하면, 이제 정말 안녕.

살며시 눈을 떴다. 아. 입이 살짝 벌어졌다. 눈이 커졌다. 하얀 손이 자신의 손이 닿은 유리에 닿아 있었다. 힘겹게 입술을 움직였다. 실 같은 목소리가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키……세.”

 

 하얀 손의 주인은 생긋 웃었다. 창백한 입술이 움직였다.

보고 싶었어요, 아오미넷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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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바스/청금]세계의 시작

쿠로바스 | 2015. 3. 1. 12:20
Posted by 물빛녘

※아오이마

 

 

[쿠로바스/청금]세계의 시작

written by. 티토

 

 

 제발 누가 헛 것을 봤다고 해줬으면 좋겠다. 아오미네는 눈 앞의 관경에 경악했다. 수많은 책들이 꽂혀 있었다. 오, 젠장, 신이시여, 이제 착하게 살테니까, 제발 이 책들을 다 읽어야 한다고 말하지 말아주실래요? …안타깝게도 신은 자신의 편이 아니었나보다. 적어도 100권이 넘어 보이는 서적들을 자신은 읽어야 했다. 이런 미친.

 

 아오미네는 머리를 쥐어 뜯었다. 뭔 놈의 서적이 이렇게 많은 걸까. 더군다나 이 책들은 죄다 외국어로 적혀 있었다. 루스국 언어였나. 자신이 살고 있는 알펜국과는 최근 교류가 늘어난 국가였다. 사막으로 왕래가 힘들어 거의 국교가 단절되다시피 되어 있던 상태였는데 돈을 벌고 싶어 환장한 상인들이 어떻게든 해로를 개척했다던가. 개척했다고 해도 바다는 위험한 생물들이 가득이라 바다로 나갔다 하면 떠난 무리의 반은 죽음이라고 생각하면 됐다. 뭐 그걸 감수해서 얻는 이익이 상당하다긴 하더만은. 그 자식들이 이윤을 챙겨 먹든 간에 지금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다시 한 번 자신이 봐야할 책들이 꽂힌 칸을 올려다 보았다. …오, 미친.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도서관이라 소리지르지도 못하고. 숨을 가다듬으며 울컥 올라오려는 것들을 억누른 아오미네는 우선 손을 뻗어 그나마 얇아 보이는 책 5권을 꺼냈다. 얇다고 해도 300페이지는 기본이었지만. 몇 페이지를 넘겨보니 모르는 말들이 한가득이었다. …사전도 빌리자. 아오미네는 침통한 표정으로 걸어갔다. 

 

 자신 혼자서는 무리다. 사전이 있다고 해도 힘들다. 도움을 부탁할 사람이 어디 없을까. 아오미네는 머리를 굴려 자신의 좁은 인맥들 중 외국어에 능통한 사람을 찾았다. 테츠? 오, 나쁘지 않다. 무난한 정도일테니까. 더군다나 여기 사서이기도 하고. 이왕 온 김에 부탁해볼까.

 

"아오미네 군?"

 

"…으헉."

 

 눈 앞에 불쑥 나타난 쿠로코때문에 놀란 아오미네는 뒤로 몇발자국 물러섰다. 놀랐잖아, 테츠! 벌렁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아오미네가 말하자 쿠로코는 미안한 기색도 없이 죄송합니다, 라고 말했다. …정말 죄송한거냐고. 뭐 좋다. 만나러 갈 생각이었으니까.

 

"테츠, 잠깐 시간되냐?"

 

"그건가요. 뭐, 됩니다만. 따라 오세요."

 

 책등에 적힌 제목들을 훑어 본 쿠로코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녀석이라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

 

"너도 참 질기군요."

 

"…어이, 테츠. 그거 실례다."

 

"아, 죄송합니다."


 전혀 죄송하지 않은 것 같은데. 차를 홀짝 마시는 쿠로코를 보며 아오미네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뭐, 이 녀석이 이러는 게 한 두번도 아니고. 손을 움직여 들고 온 책 표지를 검지로 툭툭 건드렸다. 여기에 자신이 찾는 정보가 있을까. 다과를 오물거리던 쿠로코가 아오미네를 흘깃 보더니 입을 열었다.


"역시 그걸 찾고 있는 건가요? 사람을 살릴 수 있다던, 예의 '꽃' 말입니다."


"아아."


 아오미네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꽃이라고 해도 꽃은 아니다. 사실 어느 누구도 그것의 형태를 모른다. 실존하는 것인지 조차도 의심스럽다. 그렇지만 자신은 찾아야했다. 나를 위해서, 라는 이유는 아니었다. 그가 원하니까.


"이마요시 상이 찾던 것이었죠. 그러고보니 그는 일리야국 출신이었던가요."


 일리야국. 아오미네는 표정을 굳혔다. 지나칠 정도로 폐쇄적인 국가였다. 알펜국과는 사막을 사이에 두고 있어 왕래도 힘들 뿐더러 주변국인 루스국과도 도시 하나만을 개방해 교류할 뿐이다. 혹 운이 좋아 사막을 횡단해 일리야국 국경에 도착할지라도 게이트라는 것을 통과해야만 하는데 한 번 통과하면 돌아나올 수 없다고 했다. 그런 폐쇄적인 곳에서 그는 왔었다. 사막을 건너, 자신의 약혼녀와 함께.

 

"이상하지 않나요?"

 

"뭐가."

 

"분명 약혼녀 분을 살릴 목적으로 찾는 거라고 예전에 말씀하신 적 있었죠. 하지만 이곳에 그가 왔을 때 약혼녀 분은 살아계셨습니다. 그것도 십여년동안. 그럼 이상하지 않습니까?"

 

 쿠로코는 남은 차를 한 입에 털어넣더니 아오미네를 응시하며 말했다.

 

"적당한 서적을 골라드리겠습니다."

 

*

 

 아오미네는 쿠로코에게 책을 한아름 받았다. …사전도 있었다.

 

 이상하다라. 사실 그가 찾아야 한다기에 찾는 것일뿐 자신은 아무것도 몰랐다.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왜 이곳에 왔는지, 떠나지 않는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은 7살, 어린아이였다. 일찍 부모를 잃고 골목을 떠돌던 자신을 데려갔던 그는 20살 정도 되어 보였다. 지금 자신은 25살이었다. 그리고 그는… 전혀 늙지 않았다. 일리야국 사람들은 원래 수명이 길다더라, 라는 이야기가 사실인걸까.

 

 아오미네는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쇼파에 잠들어 있는 남자가 보였다. 안경은 테이블에 올려놓은 상태였다. 유심히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일리야국인이라. 이들은 참으로 이상했다. 방대한 지식을 갖고 있음은 물론이고, 늙지 않았고, 타국에 머무르는 시간이 오래될수록 일리야국에서의 기억과 관습 등 일리야국과 관련된 모든 것을 서서히 잊어갔다. 눈 앞의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자신이 왜 여기 왔는지, 어째서 그걸 찾고 있는지, 심지어 찾고 있는 사실조차도. 그에게는 알펜국에서의 기억 일편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아오미네는 책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바닥에 앉았다. 힐끔 뒤를 보니 깰 기미는 안 보였다. 좋아, 시작해볼까. 책을 하나 골라 펼쳐 놓은 사전 옆에 놓았다.

 

 이렇게까지 찾는 이유는 단순했다. 꽃을 찾으면 그의 예전 기억들도 돌아오지 않을까. 그러고보니 나오기 전 테츠가 그랬었지. 약혼녀를 살리는 게 목적이라면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아도 되지 않냐고. 하긴 알펜국에서 '꽃'이 뭔지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꽃의 존재를 모르는 이상 그가 자신을 의지하는 이 상황이 지속되는 것이 자신에게 좋지 않을까. 문득 생각이 그리 미쳤지만 아오미네는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그럴 수 없었다.

 

"물을 주는 기가?"

 

"…?!"

 

 화들짝 놀라 책을 덮으면서 뒤를 돌아보자 안경을 쓰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마요시가 있었다. 이마요시가 깼다는 것에 놀란 아오미네는 이마요시가 책 내용을 읽었다는 것에 놀랐다.

 

"너무 놀라지 말그라. 루스국어는 쪼만할 때 배운 적이 있데이. 기억을 잊는 거지 지식을 잊는 건 아니그라. 뭐 찾는지는 모르겄지만 내가 도와준다카면 싫다하긋재."

 

 히죽 웃으며 이마요시가 덧붙였다.

 

"내, 배고픈데 뭐 먹을 거 없나?"


*


 이마요시에게 밥을 차려둔 뒤 책을 끌어안고 밖으로 나왔다. 아, 젠장. 이제 어쩌지. 혹시 이거 읽을까 싶어 들고 나왔긴 하다만. 같이 찾으면 좋긴 하겠지만, 이마요시의 몸상태는 현재 좋지 못했다. 뭐랄까, 의사의 말에 따르면 일리야국인이 타국에 오랜기간 머무르는 것은 좋지 않은 것 같다나. 뭐야, 그게. 의사 맞아? 그렇지만 실제로 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랑 다를지도.


 정처없이 걷다보니 무구점 앞에 서 있었다. 가게를 정리 중인 카가미가 아오미네의 눈에 들어왔다. 시선이 마주쳤다.


"뭐야, 살 거 있어? 미안하지만 오늘은 그냥 문 닫는데?"


"야, 카가미."


"엉?"


"너 루스국 출신이지. 마침 잘 됐다."


 쿠로코에게서 카가미가 루스국 출신이라는 것을 들은 적이 있던 아오미네는 그것을 떠올리며 말했다. 최고의 조력자를 찾았다.


*


"꽃? 뭐야, 그걸 찾는 건가."


 카가미가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뭐냐, 그 반응은. 아오미네는 미간을 찌푸렸다. 카가미는 아오미네가 들고 온 책들을 훑어보더니 책 한 권을 들고 다른 책들을 옆으로 밀어뒀다.


"이거만 보면 될거야. 다 똑같은 말들 써 있을 거거든."


 "오, 좀 읽어줘."


 카가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를 넘겼다. …야?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만 들렸다.

 

"읽어달라고."

 

"아, 소리내서 말하는 건가. 미안."

 

 제일 첫 장으로 돌아간 카가미가 입을 열었다.

 

"NaNun Jollibda."

 

 …어이. 아오미네는 어이가 없어 표정을 굳혔다. 뭐하자는 거냐, 너.

 

"번역해달라고."

 

"아."

 

 …오늘 내로 3장은 읽을 수 있을까.

 

*

 

"…뭐 이정도야. 루스국에서 알고 있는 정보는 이게 끝."

 

"별로 없는 거 같은데."


"그야 그 꽃은 일리야국에서 핀다는 것 같으니까."


 아오미네는 그 말에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리야국에서? 그렇다면 말이 안 된다. 이마요시는 처음 자신을 만났을 때 꽃을 찾아 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여기 머무르는 내내 그 꽃을 찾아 헤맸다. 그가 거짓말을 했다? 도대체 왜? 무슨 이득이 있어서? 모든 것을 잊어버리면서까지 여기 있어야 할 이유가 있었던 걸까.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면 될텐데?


 패닉에 빠진 아오미네를 힐끗 본 카가미가 말을 이었다.


"내 생각에는 이딘에 가면 더 자세한 정보를 알 수 있을 거야. 아, 이딘은 일리야국에서 유일하게 타국인이 갈 수 있는 지역. …하지만 꽃은 분명 내지에 필걸. 아마도 수도에. …어떻게 할래?"

 

 어떻게? 그가 자신을 속였다는 거에 어떻게 반응할 거냐는 건가. 어떻게, 라.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것도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그를 믿어도 되는 걸까. 아오미네는 좀 전까지 카가미가 읽던 책 표지를 바라보았다. 사정이 있었을지도. 정답은 그곳에 있지 않을까.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곳에 가야겠어."

 

"…역시 그렇게 하는 건가. 좋아, 도와줄게. 우선 루스국으로 가서 이딘에 들어가. 지인한테 연락 넣어둘테니까. 일리야국은 폐쇄적이긴 해도 어떻게든 들어갈 방법은 있거든. 하지만 걸리면 목숨은 보장 못 해. 그래도 갈래?"

 

"…갈래. 이마요시 상이 왜 거짓말을 했는지, 그 꽃이 과연 뭔지, 궁금하거든."

 

 담담하게 대꾸했다. 출발은 일주일 뒤. 그 사람도 같이 가야해. 사막을 통해 루스국으로 가는 게 더 빠를 거야. 이것저것 말을 덧붙인 카가미는 아오미네의 얼굴을 보며 씩 웃었다.

 

"세계의 시작에서 세계의 기원을 보고 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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